[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20> “반상의 환갑? 지금 기세론 못오를 정상 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일 03시 00분


‘31세 동갑’ 라이벌 구리 꺾고 中10번기 우승 이세돌

이세돌 9단은 10번기 우승으로 상금 8억5000만 원을 받는다. 10번기 우승 다음 날인 9월 29일 충칭국제공항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 충칭=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이세돌 9단은 10번기 우승으로 상금 8억5000만 원을 받는다. 10번기 우승 다음 날인 9월 29일 충칭국제공항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 충칭=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승부사 이세돌 9단(31). 올해 그는 동갑 라이벌 구리(古力) 9단과의 10번기에 올인 했고, 승리했다. 그는 "기세(氣勢)가 오른 만큼 올해 삼성화재배는 물론이고 내년 다른 세계대회에서도 우승하고 싶다"고 말했다. 바둑에선 환갑으로 치는 30세를 넘기고도 정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40세까지 승부를 겨루고 싶다"고도 했다. 다음은 지난달 28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열린 'Mlily 멍바이허(夢百合) 10번기' 우승 직후와 29일 귀국길 승용차 안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기쁘다.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기쁘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겠지만…. 특별히 기쁘다." 구리의 고향 충칭에서 열린 8국에서 9시간 반에 걸친 혈투 끝에 승리하고 6승 2패로 우승을 확정짓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한 첫마디였다. 그는 이어 "승패를 떠나 나를 상대해 준 구리에게 고맙다. 구리가 없었다면 10번기도 없었다. 가슴깊이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구리나 나나 어려운 상황에서 10번기를 시작했다. 구리는 멍바이허배 결승에서, 나도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졌다. 특히 구리에게는 샹그릴라와 티베트에서 열린 두 고산(高山) 대국이 아쉽고 억울할 것이다."

이세돌은 어려웠던 대국으로 샹그릴라 5국을 꼽았다. 그로서는 초반 2승을 하다 2패를 하고 다른 대회까지 4연패한 상황에서 맞은 대국이었다. 그런데 구리가 실수했다. 거기서 10번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는 "구리가 졌지만 근 10년간 중국의 정상을 지킨 저력 있는 기사다. 시련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번기에 대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칭위안(吳淸源) 선생 이후 7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좋은 기보를 남기고 싶었는데) 대국내용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은….

"2주 뒤의 삼성화재배 16강, 8강전에서 집중할 것이다. 10번기에서 이긴 기세로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10번기에서 이긴 것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기세가 다시 넘어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팬들에게 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는데 나는 물론이고, 우리 기사들도 이기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는 10번기 성사과정 뒷이야기도 해줬다. 그는 "그동안 몇 차례 10번기가 무산되면서 나는 줄곧 상금은 이기는 사람이 독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구리도 오케이했다"고 말했다. 한때 스폰서 측이 5 대 5로 무승부가 될 경우 한 판 더 둬 승부를 가리자고 했지만 '그러면 무슨 10번기냐'고 주장해 상금을 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합의했다는 것. 그는 10번기가 더 있겠느냐는 질문에 "나이가 맞는 기사도 없고, 세계대회에서 5회 정도 우승한 기사가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이세돌은 '요즘 어이없이 지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는 질문에 "체력과 나이, 심리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훈현 9단이 49세에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했지만 이창호 9단을 보더라도 30세를 넘기면 어려워진다.

"올해 삼성화재배와 내년에 어떤 성적을 내느냐가 중요하다. 바둑에서는 기세가 중요한데 자신이 있다. 2013년 내 기록을 보면 세계대회 4개 중에 1번 정도는 우승했다. 앞으로 몇 년간 그 정도를 유지하고 싶다. 40세까지 승부를 겨루고 싶다."

―국내와 중국의 센 기사는…. 한국 기사들 사이에서는 커제(柯潔) 4단이 세다고 한다.

"박정환 9단과 김지석 9단이다. 중국은 스웨 9단을 비롯해 너무 많다. 상향 평준화돼 있다. 판팅위도 치고 올라오고 있다. 한국기사들이 세다고 이야기하는 커제와는 아직 둬보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문제는 독보적인 선수가 없다는 점이다. 요즘 세계 대회에서 1승한 기사는 많지만 2승, 3승한 기사는 없다. 그 이유는 마음가짐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게 중국 바둑의 고민이고 한계다. 올해는 한국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다. 중국이 (세계대회에서 7연승을 거두고는 있지만) 장담할 상황은 아니다. 당분간은 해볼 만한 싸움이다."

―이동훈, 신진서, 신민준은….

"아직 중국 젊은 기사들과 실력차이가 있다. 좀더 성장해야 한다. 10번기에 오기 전에 명인전에서 이동훈에게 2패를 했지만…. 이동훈이 우승하면 (성장의)기회가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신진서는 자기 생각이 부족하다. 신민준은 실력이 좋아졌지만 기세가 좋아져야 한다. 자기 생각도 부족하다. 어릴 땐 패기가 좋아야 한다. 기량을 떠나서 패기가 중요하다."

이세돌은 10번기 우승한 날 밤, 대회 스폰서인 헝캉그룹의 니장건 회장이 주최한 만찬에서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한 뒤 호텔 방으로 올라가 홀로 밤을 보냈다. 그는 이날 '마마' '리셋' '가족끼리 왜이래' 등 드라마를 보며 휴식을 취했다고 했다. 캐나다에 있는 부인 김현진 씨(31)와 딸 혜림 양(9)에게도 승리의 기쁨을 전했다.

―언제 기러기 아빠에서 벗어나나.

"3년 후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나 미국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선 중국으로 갈까하고 생각 중이지만, 캐나다에서 3학년에 올라간 딸이 다시 중국어에 적응할 수 있을지…."

그는 바둑계 정상에서 멀어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성격상 바둑쪽 승부에서 멀어지면 바둑을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

―바둑계에 술 마시는 친구들은 있는가. 염정훈 프로 등이 거론되는데…,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있는지….

"몇 명하고는 가끔 술자리에서 어울린다. 술은 과음하는 타입이다. 바둑을 두면서 만나는 다른 업계의 사람들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최근에 인터넷 바둑사업 등을 했는데…. 베이징 이세돌 도장은 어떤가.

"잘되지 않았지만 젊었을 때 경험을 쌓는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베이징 도장은 일정 수준 운영되고 있다. 베이징은 거점이고, 중국 전역이 타깃이다. 10번기 우승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웃음)."

그는 가장 기억나는 대국으로 2001년 LG배 결승에서 이창호에게 패한 것과 도요다덴소배 4강전에서 쿵제(孔杰) 9단에게 역전승한 것, 2011년 BC카드배 결승에서 구리에게 이겨 2009년 빚을 갚은 것, 2012년 삼성화재배에서 구리에게 2-1로 승리한 것을 꼽았다. 먼저 "쿵제와의 바둑에서 굉장히 불리한 바둑이었는데, 한 수로 대역전극을 펼쳤다"면서 "바둑의 신이 도와준 천우신조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삼성화재배에서 1, 3국에서 반집씩 이기고 2국에서는 구리에게 만방으로 진 것이 10번기 성사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구리의 팬인 니장건 회장이 700만 위안(약 12억 원)을 내기로 하고 10번기 스폰서를 자청했던 것.

―중후반 흔들기에 능하다.

"흔들기라기보다는 돌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다. 바둑은 효율이 중요하다. 초반에 죽어있던 돌이라도 살리려 노력한다. 바둑이 좋으면 그렇지 않지만, 나쁘면 바둑돌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둔다." 그는 2009년 휴직 이후 바둑 공부를 별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보를 잘 보지 않는 편이고, 어느 때고 머리에 대국장면이나 고민했던 부분을 떠올린다는 것.

―'까칠하다'는 평에 대해선….

"내가 까칠하기보다는 바둑계가 순하다.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바둑계는 '둥글게 둥글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이 많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발전이 없다."

그는 김치찌개 설렁탕 육개장 등을 좋아한다고 했다. "주로 매운 것들이네"라고 하자 "맵고 자극적인 게 입맛에 맞는다"고 덧붙였다. 전남 신안 비금도가 고향인 것이 생각나 "홍어는?"이라고 묻자 "아주 삭힌 것을 좋아하고 없어서 못먹는다"며 웃었다. 그는 담배도 독한 것을 좋아한다.

끝으로 그에게 바둑이 뭔지에 대해 물었다.

"여섯 살부터 지금까지 바둑을 뒀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바둑이 인생 자체란 말을 했다. 지금은 친구처럼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변하면 바둑도 변한다. 늙어 가도 같이…."
▼ 이세돌 우승뒤엔 이창호 9단 동생의 헌신 있었다 ▼

술상대 등 밤늦게까지 뒷바라지
아마5단 실력… 바둑조언은 못해


10번기 우승의 숨은 조연은 이창호 9단의 동생 이영호 씨(38·사진)다.

이 씨는 “이세돌이 10번기에서 지면 은퇴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임했고, 그게 승리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10번기 성사에도 관여했고, 10번기 내내 이세돌을 뒷바라지했다. 구리에게는 프로기사 2, 3명과 전속 안마사까지 따라다녔으나 그는 혼자 이세돌 ‘심기 경호’까지 맡았다.

이세돌과 식사는 물론 졌을 때는 늦은 밤까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다만 그는 “바둑으로 조언을 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아마 5단의 실력. 이세돌이 자극적인 향신료가 들어있는 중국 요리도 잘 먹어 뒷바라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는 것. 이세돌은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는 베이징 이세돌 바둑도장의 공동 운영자이기도 하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대학시절 여름·겨울방학에 두 달씩 중국을 여행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사업도 한 중국통이다. 베이징에 살고 있으며, 한족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충칭=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이영호#이세돌#구리#10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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