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최모 씨(27)는 지난달 주요 대기업 및 공기업 14곳에 낼 하반기(7∼12월) 신입사원 공채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적잖게 당황했다. 업무와 직결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항목들이 적지 않았던 데다 작성해야 할 분량도 생각보다 많아서였다.
최 씨는 “수천 자씩 쓰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며 “급한 마음에 진지하게 전문 업체에 대필이나 첨삭을 의뢰할까도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이번 채용 시즌에는 자기소개서 항목이 유독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근 인크루트가 취업준비생 및 대학생 472명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99.4%가 ‘자기소개서 작성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89%는 ‘자기소개서 항목이 너무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자기소개서 항목이 너무 어려워 입사지원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는 구직자도 75.6%나 됐다.
서미영 인크루트 상무는 “17년간 채용업계에서 일하면서 이번처럼 쓰기 어려운 자기소개서들은 처음 봤다”며 “기업들이 사회적 분위기상 스펙을 요구할 수는 없는 데다 지원자가 수만 명씩 몰리니까 서류전형 단계부터 수준을 대폭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전문가도 울고 갈 문항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어려워한 항목은 해당 업계에 대한 수준 높은 전문성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거래소(KRX)가 자기소개서 항목으로 넣은 ‘현재 증권·파생상품시장의 현황을 분석하고 향후 전망과 그 이유를 기술할 것’, ‘본인이 생각하는 KRX의 차세대 성장 동력은 무엇인지’ 등이 대표적인 사례.
주요 온라인 취업 커뮤니티에서는 석·박사 연구원이나 경력직도 아닌 신입사원 지원자에게 면접도 아닌 입사서류 단계에서 이런 고난도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글이 잇달아 올랐다.
업무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기업도 적지 않아 과거 일부 문제가 됐던 공모전처럼 취업준비생의 아이디어만 뺏는 것 아니냐는 반발도 나온다. GS건설은 ‘건설(엔지니어링)업의 향후 전망과 더불어 GS건설만의 차별화된 수익성 향상 방안’을 물었다. LS네트웍스는 ‘당사 브랜드 또는 사업 분야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인지도를 제고시킬 참신한 아이디어·실현방안’을 쓸 것을 요구했다.
○ 신춘문예에 응모할 만한 분량
방대한 분량을 요구한 것도 취업준비생들에게는 부담이었다. SK그룹은 5개 문항에 총 4800자를 요구했다. 금융감독원은 작성 항목이 20개에 이르렀다. 한국거래소의 경우 지난해 4개였던 항목을 올해 18문항으로 대폭 늘려 총 9000자를 작성하도록 했다.
SK그룹은 “단순히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더 막막할 것”이라며 “정해진 글자 수는 구직자가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반박했다.
‘왜 묻는지 의도를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문항도 적지 않았다. ‘즐겨 찾는 인터넷 사이트와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이랜드의 자기소개서 항목이 대표적이다. 이랜드 관계자는 “지원자들의 평소 관심을 알아보는 과정을 통해 직무 적합도를 평가하려는 것”이라며 “개인정보나 사생활을 알아보기 위한 의도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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