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두 마녀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일 03시 00분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마녀’의 한 장면.
#1. 얼마 전 만난 대기업 인사담당 차장은 “달걀귀신보다 무서운 게 신입사원”이라고 말했다. 20여 년 전 신입사원 시절의 자신은 “이번이 선배께서 제게 내리시는 일곱 번째 잔입니다”라며 직장상사가 주는 술잔의 숫자까지 세어가는 말도 안 되는 아부를 해가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싫은 술을 받아먹었건만, 요즘 신세대 사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열불이 난다는 것이다.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하면 “저 술 못 먹는데요. 평일 점심이 어떠신지요” 하며 잘라 거절하는 건 ‘양반’에 속한다. 점심 먹자고 해도 “저 약속 있는데요” “다이어트 중인데요” “속이 안 좋아서…” 하면서 ‘나 너랑 밥 먹기 싫어’ 하는 티를 대놓고 낸다. 입사면접에선 “이 한 목숨 회사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야근과 주말근무 가능합니다. 아니, 하고 싶습니다” “저의 유일한 단점은 지나치게 인내심이 많아 손해를 보는 일이 많다는 점과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라는 입발림으로 잘 보이려 안달복달하던 자들이 입사 1년만 지나면 “이 회사의 비전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스스로를 뭔가 멋있게 생각하며 산뜻하게 사표를 던지는 싸가지 없는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란다.

최근 ‘마녀’(9월 11일 개봉)란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대기업 차장이 퍼뜩 떠올랐다. 여성 신입사원 ‘세영’이 팀장에게 사사건건 말대답하며 따지고 드는데, 알고 보니 세영은 애정결핍 트라우마가 뼛속까지 새겨진 사이코패스 마녀였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영화. 일견 공포 장르인 듯하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존재 자체가 공포’인 요즘 신입사원들에 대한 살 떨리는 메타포(은유)로도 보이는 것이다.

이 신입사원, 장난이 아니다. 자신을 혼내는 상사의 칫솔을 몰래 가져다가 자기 구두 바닥을 싹싹 닦는가 하면, “회사를 풍지박산 내겠다는 거야?”란 팀장의 질책에 대뜸 “‘풍지박산’이 아니고 ‘풍비박산’인데요”라고 쏘아붙인다. 여성 팀장이 “넌 성격이 문제가 있거나 성적(性的)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니니?”라며 운율을 맞춰 조롱해도 이 신입사원은 수치스러워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는다. 대신 팀장에게 이렇게 반박하며 똑같은 방식으로 ‘배틀’을 벌인다. “팀장님은 어떻게 남자친구가 있는 거예요? 성격이 좋은 거예요, 섹스를 잘하는 거예요?”

하긴, “팀장님, 그 반지 진짜 안 어울려요”란 직격탄을 회의시간에 대놓고 던지는 영화 속 신입사원이나, “회식하자”는 직장상사의 제안에 대뜸 “한우로요!”라고 소리치는 요즘 신입사원이나 크게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별나라에서 온 이 시대 신입사원들은 이제 공포영화의 소재로까지 모셔질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인 것이다.

#2. 미국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지독하게 쓸쓸하고 폭력적이고 감각적인 영화 ‘씬 시티’의 속편 ‘씬 시티: 다크히어로의 부활’(9월 11일 개봉)은 기대의 반에도 못 미친 졸작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팜파탈로 등장하는 뇌쇄적 여배우 에바 그린이 근육질 마초들을 유혹하며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매혹적인 비수가 되어 고개 숙인 중년남자들의 심장에 와 꽂힌다.

일단 “여자가 옷을 벗는다.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가 벗겨지는 것처럼” 같은 내레이션부터가 저질스러우면서 예술적이다. 특히 영화에서 얼굴만큼이나 젖가슴을 자주 드러내는 에바 그린이 침대에서 내뱉는 이 대사는 마초들이 미녀에게 품는 판타지를 200% 채워주고도 남음이 있다. “날 사랑할 수 없다면, 내게 상처를 줘. 날 용서할 수 없다면, 내게 벌을 줘.”

세상에! 수컷의 심장을 이토록 쿵쾅거리게 만드는 멘트가 또 있단 말인가. 만날 아내에게 용서받고 벌 받으며 사는 남편들의 핏줄 속에 참으로 오랫동안 구겨져 있던 사디즘적 본능이 일깨워지는 순간이 아닌가 말이다. 아, 상처주고 싶어! 벌주고 싶어!

그렇다. 각종 국가고시 1등도, 입사시험 1등도, 학군사관후보생(ROTC) 졸업성적 1등도 여성이 차지하는 이 시대를 사는 남자들로선 에바 그린의 이런 시대착오적인 대사에 초라한 위안이나마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남성들이여. 그러나 오해 마시길. 영화 속 에바 그린은 결국 본색을 드러낸다는 사실. 이 세상 수컷들을 모조리 유혹해 이용해먹은 그녀는 “나를 원한다면 남자답게 굴란 말이야”라는 외마디와 함께 남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이다. 영화 속 내레이션대로 그녀는 여신(goddess)이 아니라 마녀(witch)이자 포식자(predator)였던 것이다. 으헝!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신입사원#마녀#씬 시티#에바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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