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통령 선거 직후, 나는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강창성 장군에게 육군소령을 끝으로 예편하겠다고 신상건의를 했다.
강 장군은 “내가 뭘 생각 중이니 조금 더 좀 참고 있게”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강 장군을 보좌하는 인연도 여기서 일단 끝내는 게 좋겠다고 결심했다. 그러지 않아도 강 장군이 차기 보안사령관으로 간다는 풍설이 돌고 있었다. 내가 그를 따라가게 되면 또 다른 군내 파벌 싸움에 휩쓸리게 된다는 점이 싫었다.
당시 보안사령관 김재규 장군과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윤필용 장군은 서로 으르렁거렸다. 박 대통령은 윤필용의 손을 들어줬다. 김재규를 동부전선 3군단장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강창성을 앉힌 것이다. 맹수들의 싸움 틈바구니에서 얻은 횡재라고나 할까?
그런데 1973년 초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할 입장이었지만 친구인 대우실업의 김우중 군이 잡혀감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고교 동기인 이우복 군이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김 사장이 어제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었어.”
“무엇 때문에?”
“잘 모르지만 윤필용 장군 측근들과 가깝게 지냈거든….”
그때만 해도 대우는 큰 기업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사건에 걸려들었다니 나도 궁금했다.
이우복 군은 나에게 한마디 더 했다.
“이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게. 아랫사람에게 부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직접 강 사령관에게 좀 부탁해 주게.”
“우중이가 윤 장군과도 직접 무슨 관련이 있어?”
“아냐. 자네도 알다시피 사업하려면 실세들과 교제해야 되잖아. 그래서 윤 장군이나 손영길, 전두환 등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도 좀 샀겠지. 그래서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다음 날 나는 틈을 내어 보안사령부로 갔다. 마침 나와 가까이 지낸 정두헌 보좌관이 사령관실에 있었다. 사전 예비지식을 얻을 겸 물었더니 뜻밖에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부풀려 있지 않은가?
“이 사건은 국가 변란 음모입니다.”
“아니 윤 장군이 주동자란 말이야? 그는 박 대통령의 심복이잖아?”
“하여간 이 문제는 우리 사령부에서 입수한 것이 아니라 언론계 사장이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이라 우리도 이를 신중하게 다루고 있어요.”
나는 강창성 장군을 만났다.
“죄송합니다. 저와 둘도 없는 친구인데 지금 윤 장군 사건으로 연행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어낸 유능한 사업가입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누구인가?”
“대우실업의 김우중 사장입니다.”
강 장군은 서랍에서 명단을 꺼내어 확인한 뒤 이렇게 말했다.
“윤 장군 그룹이 뒤를 봐주는 기업이군.”
“정치는 잘 모르는 친구인데 사업을 하자니 권력층과 가까이 지낸 것 같습니다.”
“알겠네. 내가 체크해 보겠네.”
다음 날 김우중은 풀려나왔다. 어찌나 보안조치를 엄격하게 했는지 어디론가 즉시 숨어버렸다. 사건이 점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까지 연루되었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연 부내에서 강창성 장군과 가장 가까운 동기생인 김동근 차장보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김동근 차장보는 결국 해임되고, 영국공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지금 형편에 나하고 같이 영국으로 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 같네.”
나는 노부모님도 계시고 해서 망설였지만 무언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후락 부장이 부내에 강창성과 가까운 부분부터 도려내려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영국행을 결심했다.
떠나기 직전 출국인사차 강 사령관을 찾아갔다.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건의하고자 합니다.”
강 장군은 안경 너머로 나를 응시하였다.
“장수는 양쪽 방향으로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이후락 부장까지 조사하려고 달려들면 틀림없이 양쪽으로부터 반격을 받을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후락은 배신자야, 반역자라고!”
큰소리로 나를 꾸짖듯이 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씁쓸히 나왔다.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아 보안처장 김종진 대령 방으로 갔다.
나는 직선적으로 말했다. “대령님. 측근이라는 것이 뭡니까? 사령관님이 잘못 판단하면 충언을 드려야지요. 지금 내가 보기에는 강 사령관님이 위기예요. 반드시 반격을 받을 겁니다.” 그 순간 밖에서 나를 찾는다고 장병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리가 났다. 다시 사령관실로 갔다.
“아까 화내서 미안하네. 그런데 자네 보기에 이후락이 반격을 하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제가 무슨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후락, 윤필용 두 사람 모두 그간 쌓아 온 인맥들이 곳곳에 복병으로 숨어 있습니다.”
영국에 도착하고 한 달쯤 후, 서울에서 소식이 전해져왔다. 강 장군이 ‘보안사 유류 횡령 사건’으로 해임되어 대전 3관구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10월 유신 작업에 앞장서 깃발을 들었던 이후락, 윤필용, 강창성은 그 후 박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느라 저마다 상대방을 향하여 원한의 비수를 겨누었고, 핵분열을 했다. 그리고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 尹 ‘원충연 쿠데타 모의’ 수사… 정일권 겨냥하자 김형욱이 제지 ▼
윤필용, 사냥감이 된 맹수
“가소로운 것은 모 3성 장군은 그때까지 아직 준장에 불과하던 윤필용에게 세배까지 갈 지경이니 육군참모총장이 두 사람이 있다는 개탄까지 나돌았다.”
1963년부터 69년까지 7년 가까이 정보부를 맡았던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김경재 전 의원이 쓴 ‘김형욱 회고록’을 조금 더 인용해보면….
“윤필용은 그즈음 중대한 공작을 하고 있었다. 육사 8기 동기생들과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내 서클을 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조직을 육성하기 위해 매월 200만∼300만 원씩 경비를 지급하고 있었으며 사업가들을 등쳐서 막대한 자금을 뽑아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김형욱이 말한 ‘윤필용의 사조직’ 중 핵심은 바로 하나회. 5·16 군사정변은 군내 파벌, 특히 함경도 출신들과 영남 출신들의 세력판도를 바꾸는 데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62년 통화개혁을 주도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유원식 장군은 김동하 최고회의 재정위원장과 이주일 부의장의 반대에 부딪히자 “알래스카 놈들, 일제히 반격을 시작했군!”이라고 흥분했다(9월 13일자 ‘이종찬 회고록’ 참조).
유원식은 경상북도 안동, 김동하와 이주일은 둘 다 함경북도 출신이었다.
경상도 파벌의식에 관한 한 대구 중학 출신의 윤필용이 유원식보다 한 수 위였다. 윤필용은 1965년 육군방첩부대(CIC) 부대장 시절 발생한 ‘원충연 쿠데타 모의 사건’을 수사하면서 한신 장군과 정일권 국무총리까지 겨냥했다.
물론 5·16 군사정변 직후에 발생한 이른바 ‘반혁명사건’들이 대부분 조작된 것들이지만, 원충연 대령의 쿠데타 모의는 분명 ‘실체’가 있었다. 그런데 윤필용은 실체를 부풀렸다. 수사의 방향을 ‘원충연이 주모자가 되어 한신의 제6군단 병력을 동원하여 국정을 휘어잡고, 정일권을 국가원수로 추대한다’는 것으로 잡았다.
윤필용의 수사계획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제지당한다. 황해도 출신인 김형욱은 윤필용의 계획을 ‘알래스카 토벌 작전’으로 파악했다. 원충연은 함경남도 출신이었고, 한신 장군은 함경남도 영흥, 정일권 총리는 함경북도 경원이 고향이었다.
그랬던 윤필용이 이젠 자기가 권력의 올가미에 걸려든 신세가 되고 만 셈이다. 그가 이후락에게 했다고 알려진, “형님, 영감은 이제 노쇠했으니 쉬게 하고 형님이 맡아야 합니다”라는 말도 물론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강창성이 흥분한 것처럼 과연 ‘반박(反朴) 쿠데타 음모’인지는 의문이다.
윤필용 사건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은 이렇게 회고했다. “서로가 생존을 위해서 짓밟고, 짓밟히고, 얻어맞고 다시 때리는, 정치적 석기시대의 유혈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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