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2인자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비롯한 실세 3명의 방남(訪南)으로 남북 대화 재개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은 아시아경기 폐막식 참관을 명분으로 고위 인사를 한꺼번에 보내는 깜짝 쇼를 했다. 우리 측에선 김관진 대통령국가안보실장,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안보와 남북문제를 담당하는 핵심 인사들이 나서 북한 대표단을 만났다. 남북 고위 인사들이 만나고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2차 고위급 접촉을 하기로 합의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남북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북한 대표단의 한 차례 방문으로 남북 해빙이 이뤄지리라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북한 대표단은 김정은의 지시를 받고 왔으면서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피했다. 류 장관이 북한 대표단에 “대통령 예방을 준비할 의사가 있다”고 알렸지만 북측은 “아시아경기 폐막식 참석을 위해 왔기 때문에 거기에 전념하겠다”며 거부했다. 북한 스스로 가장 확실하게 남북 경색을 풀 수 있는 방안을 외면한 것이다. 북측이 전한 김정은의 메시지는 “(박 대통령에게) 따뜻한 인사말을 전한다”는 것이 전부였다는 게 정부 측 설명이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 사절로 온 북한 대표단이 하루를 더 체류하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면담한 것과 비교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황병서는 남한에 내려와 줄곧 군복 차림으로 북한 호위총국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다녔다. 북한군에 대한 남한 국민의 반감을 뻔히 알면서도 군복을 고집한 그의 행보에서 대화의 진정성을 찾기 어렵다. 황병서와 함께 온 최룡해 비서는 총정치국장 시절인 지난해 5월 김정은 특사 자격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 요청에 따라 인민복으로 갈아입고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위압적인 군복 차림은 아시아경기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외교 의전에도 거슬린다.
김정은은 지난달 3일 이후 한 달이 넘도록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위 대표단 파견을 통해 통치에 문제가 없음을 남쪽에 과시하고 싶었을 수 있다. 김양건 부장은 류 장관에게 “(김정은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노동신문은 어제 남북 접촉은 언급하지 않은 채 북한이 아시아경기에서 좋은 성적(7위)을 거둔 것이 김정은의 체육 중시 정책의 결실이라며 찬양에 열을 올렸다. 이번 방남이 북한 체제 칭송과 결속을 위한 것이라면 향후 남북 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북한의 강석주 외교담당비서와 이수용 외무상은 최근 유럽과 아시아 등을 방문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전격 방남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려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원하는 5·24 대북 제재조치와 금강산 관광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이 과거 도발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남북 관계는 순조롭게 풀린다. 남북 관계의 향방은 앞으로 고위급 접촉에서 북한이 내놓을 제안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