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르르!’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간간이 울먹임도 더해졌다.
“사채업자는 몇 명인가요? 돈은 언제부터 얼마를 빌렸어요? 전화나 문자로 주고받은 내용을 저장했나요?” 그녀를 향한 그의 질문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다급한 듯 그녀의 말이 빨라져도 그의 질문은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이어졌다. 오른쪽 턱 밑에 수화기를 낀 채 그는 빈 종이에 그녀의 말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
그는 이날 하루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열 통 가까이 받았다. 대부분 사채 때문에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마지막 하소연’이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송태경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사무처장(49)이 사무실을 비울 수 없는 이유다.
송 처장에게 전화를 걸어온 30대 여성 A 씨도 마찬가지. A 씨는 올해 2월 생활비가 급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고 했다. ‘그깟 100만 원, 잠시 빌렸다 갚으면 되지’라는 생각에 사채에 손을 댔지만 돈을 갚는 게 쉽지 않았다. 3개월 뒤 A 씨는 결국 같은 사채업자에게 다시 손을 벌렸다. 사채업자는 선이자를 떼고 기존 빚의 이자까지 요구했다. 이자는 처음의 두 배인 40%까지 올랐다. 사채업자의 장부에는 200만 원이 적혔지만 A 씨가 손에 쥔 것은 120만 원뿐이었다.
결국 돈을 빌려 돈을 갚는 생활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사채업자의 빚 독촉은 심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집으로 찾아가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던 A 씨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민생연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A 씨 같은 사람들에게 송 처장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용기’다. 그는 20분 가까운 통화 내내 ‘피하지 말고 마주 설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마침내 A 씨는 “사채업자를 직접 만나 거래 사실 관계를 녹음하겠다”고 답했다. 송 처장은 이마저도 불안한 듯 “(사채업자를) 고소할 수 있겠어요? 반드시 (대화 내용을) 녹음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A 씨의 다짐을 받았다.
그의 등 뒤에 붙은 유서 한 통과 편지 한 장
본보는 불법 사채·대부업 피해자들을 상대로 무료 상담을 해주는 송 처장과 올해 8, 9월에 세 차례 만났다. 송 처장의 상담 일정이 워낙 빡빡해 한 번 만남에 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첫 인터뷰는 상담이 마무리된 8월 중순 오후 7시경, 나머지 두 번은 평일 점심시간에 맞춰 서울 영등포구 민생연대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15m² 남짓한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책상 뒤 벽면에 붙은 두 장의 A4 용지가 눈에 띈다. 한 장은 상담자로부터 받은 감사편지, 다른 한 장은 사채업자의 협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30대 여성 B 씨가 죽기 전 남편에게 남긴 유서 사본이었다.
‘미안하다는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자기한테 너무 미안하고…. (중략) 이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인 것 같아.’ 송 처장은 5년 전 B 씨와 통화했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B 씨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는 친정어머니를 위해 대부업체에서 600여만 원을 빌렸다. 그렇게 한두 번 빌린 빚이 어느새 3000만 원으로 불었다. “빚진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느냐”는 송 처장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B 씨는 “아직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아기가 갑자기 우니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겠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송 처장이 B 씨와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였다.
한 달쯤 지났을까. 송 처장은 B 씨의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B 씨는 북한강변에서 변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B 씨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고 했다. 순간 “빚이 3000만 원으로 불었다”던 B 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B 씨의 남편은 아내의 메모를 보고 연락했다며 송 처장에게 유서 사본을 건넸다. 송 처장은 “유난히 곱던 B 씨의 목소리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목소리의 여운까지 아직도 선명하다”고 말했다. 5년 전 이야기를 하던 송 처장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채 피해 상담을 하며 극단적인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자책감이 그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반대로 송 처장 덕분에 “다시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는 이도 적지 않다. 올해 초 그는 발신인 이름이 없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처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 목숨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아직 해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 것 같습니다. 장사도 잘하고 있습니다. 부디 건강 지키시어 나같이 힘든 사람들의 히망(희망)이 돼주세요.”
발신인은 편지와 함께 5만 원권 20장을 보내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직접 상담한 송 처장은 곧 C 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생각나 차마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송 처장은 “돈 대신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했지만 C 씨는 막무가내였다. “처장님이 괜한 돈 걱정을 하지 않아야 나 같은 사람들을 더 구제할 것 아니냐”라며 도리어 송 처장을 나무랐다. 결국 100만 원은 민생연대 활동경비에 쓰였다.
경제학 가르치던 대학 강사에서 사채 피해 전문가로
송 처장의 사무실 책장은 자본론, 경제학노트 등 경제학 서적들로 가득했다. 그는 1990년대 잘나가는 대학 강사였다. 그의 경제학 강의는 인기가 많았다. 돈도 아쉬움 없이 벌었다. 그러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았다. 경제가 어려워졌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이는 오히려 늘었다. 그러나 사회에는 명예퇴직자, 해고자가 넘쳐났다. 불법 사채에 손을 댔다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는 더이상 한가롭게 강단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송 처장은 1998년 국민승리21의 실업대책운동본부를 시작으로 2000년부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사채 피해자들을 도왔다. 이후 진보신당이 분당해 나가는 등 민주노동당이 분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2008년 “정치 세력 간 갈등 속에서 정작 중요한 서민들의 삶이 소외됐다”며 당을 박차고 나와 민생연대를 출범시켰다. 지금도 민생연대에 접수되는 상담의 대부분을 그가 맡고 있다.
피해자들이 금융감독원 등 공공기관을 찾는 대신 ‘빽 없고 돈 없는’ 민생연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송 처장은 “불법 사채에 손을 댄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된 돈에 손을 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공공기관에 가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한다”고 설명했다. 법정이자율을 적용하면 원금까지 다 갚고 남은 사람들도 “아직 갚을 돈이 남았네요?”라는 사채업자의 한마디에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송 처장은 하루에 한 명 정도 사무실에서 직접 상담한다. 장기간 사채를 빌려 쓴 사람일수록 채무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한 건 이상 상담하기가 쉽지 않다. 적게는 5건, 많게는 20건 이상 걸려오는 전화 상담도 꽤 시간이 걸린다.
피해 상담은 △정확한 채무 내용을 정리한 뒤 △채권자의 협박에 대한 대응책을 알려주고 △고소 등 법률적 대처를 안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인 채무 내용을 정리하는 데만 4, 5시간이 걸린다. 반복적으로 사채 돌려 막기를 한 경우는 정리조차 쉽지 않다. 송 처장은 “사정이 급해 불법 사채를 쓴 사람일수록 계약 조건을 꼼꼼히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일단 서명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며 “심지어 누구에게 돈을 빌렸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빚 독촉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대부업자 ‘추 부장’에게 돈을 빌려온 주부 변모 씨가 이런 경우였다. 변 씨는 2010년부터 4년 가까이 추 부장에게 돈을 빌렸지만 실제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몰랐다. 송 처장이 변 씨의 부탁을 받아 추 부장의 신원을 추적한 결과 추 부장의 실제 성은 최 씨였다. 채무 계약이 얼마나 허술하게 이뤄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채무자에게도 사회적 책임이 있다”
송 처장은 올해 6월까지 2년간 ‘여의도 밥’을 먹었다. 2012년 6월 최재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민생정치 실험의 하나로 사채 피해 전문가인 그를 보좌관으로 채용한 것. 의원 보좌에 신경을 쓰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그는 피해자 상담에만 집중했다. 제도 개선을 위한 연구와 여론 형성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래서 송 처장은 국회에서 ‘스페셜 보좌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국회에서 그가 구제한 사채·대부업 피해자는 총 1005명. 같은 기간 민생연대에서 일할 때보다 갑절 이상의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나 아쉬움도 컸다. 송 처장은 “불법 사채 문제를 기대보다 크게 이슈화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2년 만에 민생연대로 돌아왔지만 사회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사채 피해자들은 여전히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불법 사채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이 없냐고 그에게 물었다. “비정상적인 고리대가 유지되는 한 쉽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002년 연 66%였던 대부업체 법정 최고 금리는 올 4월 34.9%까지 낮아졌지만 이 역시 여전히 높다는 거였다. 송 처장은 “12∼14세기 유럽 주요 도시국가들의 법정 최고 금리는 연 20% 미만이었다”며 “우리의 법정 금리 또한 시장 평균 금리보다 다소 높은 20%대로 조정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민생연대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과거 그의 상담을 받은 20대 여성 김모 씨였다. 송 처장을 만난 뒤 불법 사채의 그늘에서 거의 벗어난 김 씨는 “취업에 성공했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송 처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빚을 지고 살 수도 있어요. 살면서 손 안 벌리기가 어디 쉽나요. 중요한 건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채무자에게도 사회적,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김 씨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마치 사회생활 경험이 길지 않은 기자에게 하는 충고처럼 들렸다. 그 속에서 “과거와 같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는 따뜻한 응원의 목소리도 느껴졌다. 송 처장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지금 이 순간 불법 사채를 쓰려고 고민하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이 기사를 내 달라”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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