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아침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그날 아침신문에 보도된 주요 기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마침 본보 A14면에 실린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부소장의 ‘5·18 진압 주동자들을 국제재판소에 세울 수 있었다’는 기사가 소개됐다. 본보 사회부 기자가 쓴 기사가 소개되니 반가웠는데 끝 부분에 “이 기사가 동아일보에만 실려 있어 좀 의외라는 느낌입니다”라는 코멘트가 나왔다.
무슨 뜻에서 한 얘기인지 모르겠으나, 동아일보가 이 기사를 보도한 것이 의외의 일인가?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권 부소장의 발언은 18일 대법원 산하 연구기관인 사법정책연구원이 주최한 학술강연에서 한 얘기였고, 하루 전날 강연 자료도 배포돼 있었다. 기삿거리가 된다고 판단한 후배 기자는 신문기자들이 다 쉬는 토요일에 일부러 권 부소장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권 부소장의 주장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행위는 ‘반인도적 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울 수 있는 범죄였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국제형사법이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국제사회에서 법에 의한 지배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취지였다. 벌써 14년째 ICTY 재판관으로 일하고 있는 권 부소장의 시각이 보도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 필자는 그날 아침 동아일보를 빼고는 다른 어떤 신문도 이걸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 의외로 느껴졌다.
권 부소장이 강연에서 지적한 것처럼 요즘 국제재판소의 핫이슈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국가원수들을 ICC 법정에 세우는 문제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반인권 범죄로 기소 대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올해 7월 6일 한국인으로서 국제재판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상현 ICC 소장, 권 부소장, 정창호 크메르루주 유엔특별재판소 재판관 등 3명과 한자리에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어렵게 모인 이 자리에서도 김정은 기소 문제가 화제가 됐다.
이 자리에서 권 부소장은 김정은 기소는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단 김정은을 ICC에 기소하게 되면 남북 정상회담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한국이 ICC 협약국인 만큼 김정은은 체포해야 하는 대상이지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 ICC 재판관으로 일해온 송 소장은 내년 초에, 권 부소장은 내년 여름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다. 두 명이 잇따라 임기를 마치게 되면서 당장 우리로서는 이들의 뒤를 이어 누군가 국제재판소에 진출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게 됐다. 그러나 10여 년의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곧 한국에 돌아올 이들을 우리 정부가 또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일반 법관 같았으면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이라는 최고 법관의 자리에 오르든지, 아니면 중도에 변호사 개업을 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지만 국제재판관으로서의 경력은 변호사 개업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해 국제사회에 기여했다는 큰 명예를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지만, 국제사법무대에서 이들이 10여 년 동안 일하며 체득한 경험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이 경험한 세계는 사법 분야라기보다 외교 분야에 더 가깝다. 총성 없는 전쟁터인 국제정치무대에서 한 톨이라도 국익을 챙기려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배운 분들이다. 내년에 두 사람이 차례로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종신직 대통령 고문’쯤으로 모셔서 그들의 지혜와 경륜을 국가재산으로 영구히 몰수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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