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행동’ 서명한 학생들, 부정행위 유혹에 안넘어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8일 03시 00분


[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1> 부패없는 대한민국, 지금 나부터
中 미래세대 교육 제대로

“생도는 거짓말, 부정행위,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A cadet will not lie, cheat, steal or tolerate those who do).”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는 이 같은 서약이 거대한 돌에 새겨져 있다. 생도들은 이 약속을 철칙으로 여기고 처벌보다 불명예를 부끄럽게 여긴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모든 시험은 감독관 없이 진행된다. 학생들은 시험이 끝난 후에 “나는 아너 코드(honor code·명예규정)를 어기지 않았다”라고 서명한다. 본인뿐 아니라 타인의 부정행위까지 학교에 신고하도록 하고, 위반 시엔 퇴학까지 감수해야 한다.

아너 코드는 사람들 스스로 정직하게 행동하겠다는 서명을 남기는 일종의 명예로운 규정이다. 미국 유명 대학들은 오래전부터 학생 스스로 명예를 지키게 하기 위해 시험뿐 아니라 과제물 제출 등 학교생활 전반에서 아너 코드를 운영해 왔다. 그 대학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공직사회, 기업체, 학교 등에서도 얼핏 보면 아너 코드와 비슷한 ‘청렴서약식’이 해마다 열리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서명하는 것과 일회식 보여주기 행사는 다르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 “서명 안한 학생들이 부정행위 더 많아”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아너 코드엔 부패와 범죄를 막는 도덕적 각성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해 보였다. 유혹의 순간 도덕적 규범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 예방효과가 있다는 것. 본보 취재팀은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팀에 의뢰해 애리얼리의 실험을 약간 변형시킨 ‘심리적 자물쇠’ 실험을 실시했다.

이번 실험은 서울 상암중학교 3학년 학생 20명을 10명씩 두 그룹으로 나눠 한 팀에만 ‘나는 다음의 과제를 정직하게 수행할 것을 약속합니다’라는 문구를 직접 쓰고 서명하게 했다. 학생들에게는 제한된 시간 동안 12개의 소수가 적힌 매트릭스에서 둘이 합쳐 10이 되는 조합을 가능한 한 많이 찾을 것을 주문했다. 시험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맞힌 숫자만큼 상품을 주겠다고 했다.

감독관은 시험지는 필요 없으니 재활용 수거함에 알아서 버리고 문제를 푼 학생이 직접 자신이 맞힌 개수를 답안지에 적어 내라고 했다. 감독관이 간단한 안내를 마치고 자리를 피하자 학생들은 자신이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들키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제한 시간 7분 동안 두 그룹의 행동은 딴판이었다. 아너 코드에 서명하지 않은 학생들은 서명한 학생들보다 자신이 맞춘 개수를 부풀려 적어 냈다. 아너 코드 그룹은 총 20개의 문제 중 평균 다섯 문제를 풀었다. 서명을 안 한 학생들은 평균 일곱 문제를 풀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아너 코드 집단 학생들 중 일부는 답안지에 풀이과정을 자세히 적는 등 자신의 ‘결백’을 드러내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아너 코드를 떠올리는 것이 학생들이 정직한 행동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부패에 민감한 학생들은 스스로 정직한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드러내는 경향을 나타냈다”며 “어릴 때부터 아너 코드를 습관화한다면 사회의 부패 저항력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집단적, 일회적 청렴서약식 효과 없어”

올해 7월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는 기말고사를 보던 3학년의 한 반 학생 17명이 부정행위에 가담했다가 모두 0점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로스쿨생에게 돈을 주고 토익 부정 응시를 부탁한 명문대 대학생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아너 코드의 실종이 부른 현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부정행위는 물론 부패 문제와도 직결될 수 있다. 올해 8, 9월 국토교통부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산업통상자원부 농림축산식품부 교육부 복지부 등 정부 부처는 잇달아 반부패 결의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회성 이벤트에 가까운 ‘청렴실천대회’ ‘반부패서약식’보다는 각 업무 영역 전반에 ‘아너 코드’를 세밀하게 설치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지적한다.

애리얼리도 그의 실험에서 일회적인 서약식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명예서약식을 갓 마친 프린스턴대 신입생들도 아너 코드를 상기시키지 않은 상태의 시험에서는 아너 코드 문화가 전혀 없는 타 학교 학생들만큼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는 계약서, 허가서, 야근일지에 아너 코드 서명란을 만들어 수시로 상기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국내 대학 중에는 한동대가 1995년 개교 때부터 아너 코드를 운영하고 있다. 한동대는 입학할 때와 매 학년 시작할 때 총 4번 명예서약에 서명한다. 중간 기말고사 시험지엔 “나는 정직하게 시험에 응하였음을 확인합니다”라는 서명란이 있다.

이 학교 명예제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오경준 씨는 “아너 코드가 모든 부정행위를 막지는 못하지만 컴퓨터 불법복제 프로그램 사용 등 일상 습관까지 고민하는 학우들을 많이 봤다. 아너 코드는 학생들을 강제로 옭아매는 규칙이 아니라 스스로 정직을 선택하게 만드는 문화”라고 말했다.

신동진 shine@donga.com·장관석 기자
#국가대혁신#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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