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월 3일 아침, 나는 서울 삼청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불려갔다. 위원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노재원 대사도 만났고, 금진호 동력자원부 국장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알고 보니 국보위의 핵심멤버들이었다.
한참 후에 보안사령부의 권정달 정보처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상연 정보처 보좌관, 언론 검열팀의 강기덕 보좌관(후에 본명이 이상재임을 알았다)이 도착했다.
전 위원장이 반갑게 맞으며 몇 마디를 하는데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제부터 권 처장을 중심으로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업을 잘 추진하기 바랍니다.”
그 이상의 지침은 없었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우리 일행은 다시 보안사의 권 처장 사무실로 갔다. 복도에서 허문도 비서실장을 만났는데, 그가 대뜸 “선배님 오늘 아침, 정당 만드는 태스크포스로 부장님께 신고했지요?”라고 했다.
아침에 모인 사람들이 바로 창당 작업팀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이어 허 실장이 “윤석순도 참여시키면 어떻겠어요?”라고 했다. 정보부 총무국 부국장으로 부 개편작업을 맡고 있던 윤석순은 허삼수, 허문도와 부산고 동기 동창이었다.
“윤 부국장은 그동안 국내업무를 담당해 왔으니 나보다 더 정통할 겁니다.”
우리는 보안사 뒤편 2층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임시로 업무가 분장됐다. 강기덕은 언론계인사, 이상연은 예비역을 포함한 군부, 나는 구 정치인, 교수, 사회 저명인사 가운데 때 묻지 않은 인물들과 접촉하기로 했다.
당시 내가 듣기로 창당문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시동을 걸고 있었다. 우선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노태우, 정호용과 경북고 동창인 김윤환이 여야 정치인들을 만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움직임은 윤필용 사건 이후 삼성에 가있던 권익현 선배가 주동이 돼 창당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움직임에 대해 허화평 실장은 심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지금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려는데 구시대 정치권이나 재벌과 밀착하고 있는 이런 인물들이 앞에서 날뛰면 이미지에 큰 손상이 옵니다.” 그는 단호했다.
다음 날 오후, 윤석순과 함께 보안사로 갔다. 작업관계에 대해 서로 협의를 했지만, 어떤 지침도 없었다. 모두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강기덕은 약간 귀찮은 듯 언론계 인명록을 갖다놓고 처음부터 사람을 골라가면서 써내려갔다. 언론계 인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막연하게 국회의원 명단, 연감에 있는 인명사전을 보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거명하며 작업을 해보려 하였으나 그것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10여 명 정도 명단을 만들어 놓고 보니 우리가 그들을 만나서 막연히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정도로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정도는 대충 정리를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선결과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정구호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연구보고서를 들고 권 처장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전 사령관의 요청으로 작업을 했는데 결과를 사령관에게 보고하려 하자 권 처장과 의논해 결론을 내린 다음, 다시 종합 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권 처장은 나에게 정 국장을 같이 만나보자고 했다. 정구호는 대구사대부고 출신인데 언론계 내에서 ‘전두환 직계’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정리한 창당 보고서의 주제는 ‘민족복지국가’였다.
“우리가 새로 건설할 나라의 브랜드를 ‘민족복지국가’로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민족 문제에 대해 관심이 적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라는 평가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박정희 대통령도 말기에 경제발전에 걸맞은 복지혜택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을 했지만 실현을 못보고 서거했습니다.”
그러나 권 처장은 그의 면전에서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자꾸 민족, 민족, 너무 민족을 앞세우지 마세요!”
내가 정 국장을 거들었다.
“그렇다고 단지 복지국가 건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자 권 처장은 “이렇게 합시다. ‘민주복지국가’라고 말이지요”라면서 정구호의 보고서에서 ‘민족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구절마다 사인펜으로 민족을 지우고 민주로 바꿔 넣었다.
“어때요. 말이 되지 않아요? 이걸 좀더 보강하여 하나 만들어 주세요.”
며칠 후, 정구호가 보완한 연구보고서가 전 사령관에게 전해져 ‘민주복지국가’ 건설이라는 구호가 채택되었다.
7월 15일 전 사령관의 주재로 회의가 소집됐다. 정도영, 권정달 처장,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대령과 내가 자리에 앉자 전 사령관이 “노 장군은 어떻게 되었나?”라고 물었다. 약 10분 후에 수경사령관 노태우 소장이 카키색 군복에 지휘봉 대신 말채찍을 휘두르며 들어와 전 사령관에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했다. 전 사령관은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를 권했다.
좌정이 되자 권 처장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헌법개정안이었다. ▼ 전두환, 회의 때마다 노태우 찾아 ▼
국보위 전두환과 노태우 수경사령관
이종찬 중위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전두환 대위를 처음 보던 날도 전두환은 “좀 있다 노태우 대위가 오면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아 민정당 창당과 헌법 개정 등 ‘대권(大權) 인수’ 준비를 할 때도 꼭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 온 다음에야 회의를 시작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이런 모습을 이종찬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태우의 ‘전두환 보직 물려받기’는 뉴스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유명한 일화다. 아니 사실이다. 친구 사이의 그런 보직 물려받기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까지 이른 건 정말,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없는 ‘토픽감’이 아닐 수 없다.
노태우가 2011년 펴낸 회고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 후’부터는 논쟁이 붙거나 싸움이 일어나면 찾아가 말리고 조정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원래 선천적인 소질이 있는데다 경험을 쌓다보니 ‘조정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의 이런 장점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전두환이었다. 나의 이런 성격을 가장 많이 활용한 사람도 그였다. 그래서 우리는 숙명적으로 더 친해진 것 같다.”
‘그 후’란 북극성회 회장을 맡고 있던 노태우 대위가 소령 진급 탈락을 자청한 일을 말한다. 북극성회는 자칭 4년제 정규 육사 졸업생들의 동문회.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생들은 스스로를 ‘정규 1기’라고 부르며 자부심을 키웠다. 대위 때까지는 진급이 동시에 이뤄졌다. 그런데 소령 진급부터는 3단계로 나눠서 한다는 방침이 내려오자 11기생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노태우는 그 자신이 쓴 것처럼 본인은 ‘고위층과의 관계나 그들의 평가’로 볼 때 1차 진급 대상이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북극성회 회장으로서 자진 탈락을 결행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11기생들의 집단반발이 가까스로 수습됐다는 얘기다.
그 후로도 친구들끼리 라이벌 의식이 작용해 다툴 때면 노태우가 가운데서 중재를 했고, 전두환은 거의 조건 없이 노태우의 의견에 동의해줬다고 한다. “개성이 가장 강한 친구가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나의 조정안에 따라 주니까 다른 친구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노태우 회고록)
‘개성이 가장 강한 친구’는 물론 전두환이다.
그렇게 시작된 우정이라고 해도 그런 일이 겹치다보면 개성이 강한 친구가 ‘대장’이 되고, 중간에 선 친구는 ‘대리인’이나 ‘2인자’가 되기 십상인 게 또한 세상사. 이종찬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으로부터 들은 일화를 전해줬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일이었다고 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뭔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마디를 거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이 ‘가만 있어봐!’라며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끊더라는 겁니다. 문희상 위원장이 대통령비서실장 때였는데,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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