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미국에 가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쓴 책, 그녀에 대한 책을 모았다. 그녀 특유의 화법에 익숙해지려고 각종 동영상을 보고 연설문 모음집까지 샀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67). 그녀가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기 전에 따로 만날 수 없을까 하는 ‘아메리카 드림’을 안고 미국 땅을 밟은 지 5개월.
요즘 난 다른 여자에게 빠져 있다.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혼내는 그녀 모습을 TV에서 우연히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뉴욕 맨해튼과 집을 오가는 롱아일랜드레일로드(LIRR) 기차 안에서 그녀 자서전을 밑줄 치고 읽으며 매료됐다.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65·매사추세츠·초선)이 그 주인공이다.
왜 나는 힐러리 대신 초면의 워런에게 빠졌을까. 힐러리는 방어적이지만 워런은 공격적이다. 뉴요커가 많이 읽는 진보 성향 월간지 ‘하퍼스 매거진’은 최근호에서 힐러리 대통령 불가론을 폈다. “힐러리의 대선 경쟁력은 세 가지다. 1.경험이 많다 2.여자다 3.그녀 차례다. 그것이 그녀를 적극 지지할 정치적 이유가 될 수 있나.”
워런은 진보의 이런 갈증을 풀어준다. 불평등(inequality)에 맞서는 전사(戰士)를 자임한다. 별명이 ‘월가 보안관’ ‘대형은행 천적’. 그는 “미국은 지금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가진 자와 힘센 자들이 짜고 치는 게임 같은 세상이 돼 버렸다”고 말한다. ‘1% 대 99%’ ‘월가를 점령하라’ 같은 시류를 반영한다.
힐러리는 경륜을 내세우지만 워런은 가치를 주장한다. 차가운 머리(힐러리) 대 뜨거운 심장(워런)의 대결 같다. 힐러리 신간은 국무장관으로서 직면했던 중요한 순간들을 기록한 ‘힘든 선택들(Hard Choices)’. 반면 워런 자서전은 ‘싸울 기회(A Fighting Chance)’다. “미국은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 등록금을 벌어가며 하버드대 법대 교수까지 된 나도 그랬다. 그 미국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가졌던 그 기회, (잘살기 위한) 싸울 기회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기 위해 난 싸우겠다.”
힘든 선택을 해왔다는 여자와 싸울 가치를 내세우는 여자, 누구에게 더 끌리는가.
힐러리 뒤엔 클린턴(전 대통령)이 있지만 워런 뒤엔 케네디 가문이 있다. 파산법을 전공하고 소비자운동을 하던 워런을 정치에 눈뜨게 한 사람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2009년 별세)이었다. 워런은 월가 대형은행의 ‘횡포’에 맞서는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지지해준 케네디 전 의원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와 헤어진 뒤 결국 울음이 터졌다. 난 정치가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난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깨끗이 씻겨 나간 기분이다. 그는 옳은 일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가르쳐준 (정치)모델이다.”
워런은 지금 케네디 전 의원의 자리에 앉아 있다. 미 언론들은 “(케네디가 수십 년 지켜온)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은 대통령에 바로 도전할 수 있는 대표적 자리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적어도 난 클린턴보다 케네디를 더 좋아한다.
최근 진보 진영 내 여론조사에선 워런이 힐러리를 앞서기도 했다. 힐러리는 그런 워런에게 제휴의 손길을 뻗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강력한 적수를 동지로 만드는 전략을 펴고 있다”고 해석했다.
워런에게 흔들린 내 마음을 힐러리가 되돌릴 수 있을까. 미국에서 지켜보는 미국 대선의 향방에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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