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장수기업’ 육성 물거품 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4일 03시 00분


상속증여세법 개정안 부결 파장
富의 대물림-부자감세 오해로 발목… 가업상속 기대 컸던 중기인들 당혹

생필품 제조업체인 A사는 기술력이 뛰어나 2007년까지 관련 업계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창업주가 2008년 사망한 직후 회사 주인이 바뀌었다. 유족들이 150억 원대의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려고 지분을 팔다 보니 경영권이 다른 회사로 넘어간 것이다. 최근 유족들이 회사를 다시 인수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3일 중소기업중앙회 등에 따르면 전날 열린 국회 본회의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가업 상속 시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내용의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이 부결됨에 따라 중소중견기업 업계가 크게 실망하고 있다. 세법 개정을 계기로 가업상속에 따른 세금 부담이 감소하면 A사처럼 유족들의 의도와 달리 경영권을 포기해야 하는 사례가 줄어들 것이라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행 상속증여세법상 중소기업이나 매출액이 3000억 원 미만인 중견기업은 가업 상속 시 과세표준(세금부과 기준금액)에서 최대 500억 원까지 공제받을 수 있다. 이런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해 가업을 잇는 사람은 상속 전 2년 이상 가업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고 상속 후에는 10년 이상 경영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업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올 8월 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기업 매출액 조건을 ‘5000억 원 미만’으로 확대하고 상속받는 사람이 상속 전 가업에 2년 동안 종사토록 한 요건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세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같은 개정안이 부결되자 기업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논평을 내고 “중소기업계는 세제개편안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개정안이 부결돼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창호 중기중앙회 가업승계지원센터장은 “가업승계 관련 세금공제 혜택은 순수 가업용 자산에만 적용되고 부동산 미술작품 등 업무와 관련 없는 자산은 공제대상에서 제외되는데도 부의 대물림, 부자감세라는 오해에 법 개정이 무산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중소중견기업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정부와 정치권에 상속증여세법 완화가 꼭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혀왔다. 1970, 80년대 산업화를 이끈 1세대 기업인들의 고령화로 후세대에게 기업을 물려줘야 하는 시기가 왔지만 50%에 달하는 상속세 부담 때문에 매각하거나 폐업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에는 200년 이상 된 기업이 3113개나 있지만 한국에는 200년 이상 기업은 단 한 곳도 없고 100년 이상인 기업만 7개 있을 뿐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명문 장수기업을 육성하려던 정부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는 “가업 상속에 대한 세제 지원은 단순히 개인에게 금전적 이익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연속성을 높여 고용을 창출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라며 “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법 개정이 무산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동일 dong@donga.com / 세종=홍수용 기자
#장수기업#상속증여세법#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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