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 기자의 뫔길]오현 스님의 노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9일 03시 00분



“노망이 들어 무문관에 있습니다. 금족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화 못 받습니다. 3개월 보내고 해제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설악산 신흥사의 큰어른인 조실(祖室) 오현 스님(82)으로부터 날아온 휴대전화 문자입니다. 문맥상 아마 지인들에게 같이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잡념의 구름을 한꺼번에 물리치는 바람 한 줄기를 맞은 듯했습니다.

무문관(無門關)은 중국 남송의 선승 무문 혜개가 지은 책 ‘선종무문관’의 약칭입니다. ‘조주와 개’로 시작해 선종의 대표적인 48가지 화두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바깥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깨달을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의 수행 공간이라는 의미도 담게 됩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무문관이라,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허나, 세상의 관습이나 시시비비에 구애받지 않아온 스님의 행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2년 전 스님의 동안거 해제 법문은 그야말로 촌철(寸鐵)이었죠. “지금까지 2000년간 팔만대장경에 빠져 죽은 중생이 얼마고 1000년 전 조주와 황벽(선사) 같은 늙은이들의 넋두리에 코가 꿰인 이들이 얼마냐.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골동품이고 문화재이지 진리가 아니다.” 스님은 이어 “여러분이 오늘 산문을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의 가슴 아픈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아라”라고 일갈했죠.

다른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면 큰 사건이 벌어졌겠죠. 하지만 오현 스님이기에 세상은 “오현 스님답다”고 했습니다.

시조시인이자 문화예술계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스님은 지난해 평생 심혈을 기울인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통째로 기증했습니다. “집(만해마을)을 짓기는 했는데 어디에 갖다 버릴까 고민하다 동국대 기증을 결심했다”는 게 그 소감이었죠.

지난해 부처님오신날 인터뷰에서 제 딴에 꽤 껄끄러운 질문을 던진 기억도 납니다. 단도직입 ‘깨달았냐’고 묻자 스님은 씩 웃으며 ‘잘 써라. 안 그러면 시끄럽다’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는 가짜 중이야. 서부영화 보면 카우보이가 황금을 평생 찾다 결국 못 찾고 죽잖아. 깨달음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좋은 날은 죽는 날이야.”

전, 어쩐지 동안거 무렵마다 나오는 자료의 ‘수행’ ‘용맹정진’이라는 단어보다는 ‘노망이 들어’라는 표현이 훨씬 마음에 꽂히네요. 사사로움이 없는 공심(空心)과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야말로 요즘 바람 잘 날 없는 종교계에 필요한 것 아닐까 합니다.

동안거 해제 뒤, 또 다른 문자를 기다려 봅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오현 스님#노망#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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