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초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정치일정상 1월 15일까지 창당대회와 대통령 후보지명을 끝내야 2월 대통령선거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구당 조직책 인선작업에 속도를 냈는데 서울, 그중에서도 종로·중구는 어려웠다. 정치1번지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성에 차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나 내세울 수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권정달 사무총장은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씨를 영입하려 했다. 당시 오제도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다며 주로 중구의 이북출신들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권 총장은 오제도를 영입함으로써 그의 창당기도도 막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당내에서, 특히 송지영이나 윤길중 선생같이 과거 그에게 직간접으로 피해를 본 분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그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권 총장의 거듭된 재촉에 할 수 없이 만났다. 창당 작업을 중단하고 민정당의 종로·중구 조직책을 맡으라고 했더니 그는 불감청고소원이라는 듯 즉각 호응했다.
1월 13일 나는 창당 종합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로 갔다. 마침 보좌관실에 허화평, 허삼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허화평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너무 이상을 좇을 수도 없지만 지금 작업하신 신당의 조직책 면면을 보니 국민에게 신선감을 주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서울은 신당의 운명이 걸려 있고, 특히 종로·중구는 정치1번지인데 구시대의 대표적 인물, 극우반공 검사출신인 오제도를 조직책으로 선정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당을 창당한다고 돌아다녀서 그를 주저앉히기 위해서 나온 고육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런 사람을 정치1번지에 내보낸다면 신당은 사람이 없어서 때 묻은 사람을 빌려다 내보낸다고 국민들에게 비겁하게 비칠 것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하다가 “선배님이 나가십시오”라고 말을 맺었다.
“내가요?”
일순 나는 당황했다. 내가 출마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어떻습니까? 종로에서 성장했고, 학교를 다녔고…. 더이상 좋은 사람을 고르는 것보다 건곤일척으로 모든 걸 걸고 심판받아야지요. 우리가 몸을 사려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답변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침을 꿀꺽 삼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걸지요. 나로서는 전혀 미숙한 처지이지만 배워가며 싸우지요.”
그는 나의 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각하에게 가서 말씀 하십시오. 아마 그분은 생각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의논결과가 아니라, 선배님의 생각으로 말씀하십시오.”
나는 보좌관실에서 나와 즉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날은 약간 시간이 비어있었는지, 아니면 허 보좌관이 일정을 조정하였는지 전두환 대통령이 혼자 서류를 보고 있었다.
“각하, 긴급히 건의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전 대통령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신당을 창당하는데 서울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종로·중구는 간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오제도란 구시대 정치인을 빌려서 내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총대를 메고 나가서 싸우는 것이 당의 명예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각하께 건의드리려 왔습니다.”
전 대통령은 소파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종찬, 잘 생각했다! 나도 동감이다. 그래 정정당당하게 싸워야지, 안 그래?”
오제도 문제는 허 보좌관이 즉시 권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지시’라고 콱 눌렀다. 권 총장은 그날로 오제도에게 조직작업을 중단하고 이종찬을 도우라고 설득하면서 전국구 후보를 약속했다.
1월 20일 종로·중구 지구당 조직책이 내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었다.
“아니, 아무런 경험도 없는 사람을 내보내서 심판받겠다고? 어디 한번 보자.” 이렇게 벼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날부터 종로·중구의 어른들을 찾아 인사하러 나섰다.
우선 윤보선 전 대통령을 안국동 댁으로 찾아뵈었다. 윤 대통령 댁과 우리 집안은 오래전부터 세교가 있었다. 그분은 약관의 청년시절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야당의 원로로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셨던 분이 민정당 후보를 격려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종찬 후보의 할아버님과 그 가족은 독립운동의 온갖 뒷바라지를 하며 나라를 위해 재산과 목숨을 다 바친 분들이다. 중국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댁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그의 조부께 보답하기 위해서도 그를 도울 것이며….”
그분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엄청난 저항을 하였으나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비교적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 윤보선에게 절 올린 전두환 숙부 ▼
이시영 선생 저서 ‘감시만어’가 이어준 인연
이종찬이 ‘정치1번지’에서 당선된 후 어느 날,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바로 명륜동 자택을 찾았다.
“이 의원, 축하하오. 그런데 내가 사과할 것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요.” 이종찬이 의아해하자 안 박사는 사연을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문교장관 때 이시영 부통령께서 나를 불러 이 책을 내주시면서 ‘잘 번역하여 활용하라’고 하셨소. 그런데 6·25전쟁이 나고, 나도 장관을 그만두게 되어 그분의 뜻을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소.”
안 박사가 꺼낸 책자는 이종찬의 작은 할아버지인 성재(省齋) 이시영 선생이 쓴 ‘감시만어(感時漫語·사진)’였다. 이종찬의 기억. “사실 우리 집안에서는 성재 할아버님이 유일한 저작으로 ‘감시만어’를 쓰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책의 원본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그 진본을 구했으니…, 마치 오래전에 헤어져 생사조차 몰랐던 형제를 만난 기분이었다.”
‘황염배의 한국관을 반박한다’는 부제가 붙어 있는 ‘감시만어’는 성재가 1934년 중국인 교육학자 황염배의 저서 ‘朝鮮(조선)’을 반박한 일종의 역사논문이었다. 1934년이면 윤봉길 의거 직후라 임시정부가 쫓기고 쫓기던 시절이었지만, 임정 국무위원이던 성재는 ‘조선’이라는 책이 ‘일본인을 대신하여 일본을 선양한 듯한 느낌이 들어 메스껍기 이를 데 없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붓을 들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문으로 서술한 책이라 번역이 필요했다. 그때 지구당 부위원장이 모시고 온 한학자가 반구(反求) 전상희 선생, 바로 전두환 대통령의 숙부였다.
소설가 천금성 씨가 1981년 펴낸 전두환 대통령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보면 첫머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여섯살 두환은 형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천자문과 계몽편을 배웠다. 스승은 23세 된 숙부 상희였다.
‘맹자 왈(孟子 曰)
애인불친(愛人不親)이어든 반기인(反其仁)하고
치인불치(治人不治)여든 반기지(反其知)하고
예인부답(禮人不答)이어든 반기경(反其敬)이니라’
숙부 상희가 낭송을 마친 뒤 뜻을 물으면 두환이 형을 제치고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나 친함이 없으면 곧 나 자신이 어질지 못함이요, 사람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곧 내가 깊이 알지 못함이요, 사람에게 예를 베풀어도 답이 없으면 곧 내가 공경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잘못을 남에게 구하지 않고 늘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맹자의 ‘반구(反求)’는 형제들이 이미 알고 있는 뜻이었다.”
‘감시만어’의 번역은 재야 사학자인 임승국 선생이 했지만, 반구 선생은 감수를 하고 제목의 글씨도 직접 썼다.
그리고 무슨 뜻에서인지 이종찬에게 ‘나라의 큰어른’인 해위(海葦) 윤보선 전 대통령을 뵙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카가 대통령이 된 뒤에야 상투를 잘랐다는 반구 선생은 공경한 마음을 극진하게 담아 해위에게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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