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당 창당 이듬해인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장영자라는 여인이 저지른 천문학적인 어음사기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중앙정보부 차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남편 이철희 장군이 있었고, 그녀의 형부는 이규광 장군, 바로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이었다.
누구도 이런 배경을 가진 인물이 어음을 사기했다고 믿지 않았다. 게다가 자금 사정이 빡빡한 기업들엔 장영자가 빌려주는 돈은 가뭄에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공영토건이 이 자금사슬에 묶여 있었다. 공영토건 오너는 막강한 권정달 사무총장과 가까운 친구였다. 사건이 터지자 이규광, 권정달이 배후라는 보도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청와대는 사건전모가 밝혀지기도 전에 이철희, 장영자 두 사람을 일단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은 그 정도로 진정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거래은행인 조흥은행과 상업은행 행장은 퇴진시키고, 상업은행장은 구속까지 했다. 희생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도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청와대는 밀리고, 밀리다가 드디어 5월 18일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구속했다. 그것으로 끝나게 되나? 아니다. 권정달의 목마저 내놓으라는 것이 흥분한 군중들의 요구였다.
다음 날인 5월 19일 장세동 경호실장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대통령이 소년체전 참석차 대전에 와있는데 빨리 오라는 전갈이었다. 쏜살같이 내려가 대통령 전용 기차에 대기하고 있는데 잠시 후 오찬을 마친 전 대통령이 들어왔다.
“권 총장의 사표를 받아야만 하겠어. 더이상 끌고 가다가는 권정달의 신상에도 좋지 않을 것 같네. 서울 올라가서 권 총장의 사표를 받아오게.”
나는 한참 생각했다. 그래도 권 총장을 구해야 했다.
“각하, 지금 여론이 악화되어 사표를 받아야 합니다만, 만약 권 총장만 단독으로 사퇴시키면 그가 이·장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것보다 권 총장을 포함해서 전원의 사표를 받는 것이 분위기 일신을 위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외의 진언이었는지, 전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냐, 한발 더 나가자. 당직도 개편하고, 내각도 바꾸자! 그게 민심수습에 더 좋은 것 아냐? 지금 당장 올라가서 당직자 전원의 사표를 받아오게. 그리고 사후 수습을 위해 자네와 이재형 대표는 사표를 반려할 터이니 그렇게 준비를 하게.”
나는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결심만 하면 행동이 빠른 것이 특징이다. 즉시 벨을 눌러 장세동 실장을 찾았다.
“국회수첩 있지? 그것 가지고 와.”
전 대통령은 국회수첩을 한 장씩 들추면서 나에게 물었다.
“사무총장은 누가 좋겠나?”
나는 평소 생각을 진언했다.
“이 난국을 수습하려면 역시 당을 확실히 장악하고, 또 각하의 생각도 잘 아는 권익현 의원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가 잘하겠지?”
권 의원은 평소 청와대 측근들과는 그리 매끄러운 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여러 번 당직자명단에 올랐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정책위의장은 진의종 의원으로 무난히 낙착됐다.
“정무장관과 당의 (총재)비서실장은 누가 좋은가?”
“정무장관은 오랜 야당생활을 해서 대야 관계가 좋은 오세응 의원이 좋겠고, 총재비서실장엔 바로 조금 전에 행사를 주관한 남재두 의원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모두 경기고 출신을 천거하였다.
“둘 다 좋지. 그런데 김정례 의원이 투사형으로 매우 적극적인데 어떻게 발탁해야 되겠나?”
“당의 여성위원장보다는 정부에 입각시키심이 어떨까요?”
전 대통령은 그럴 의사가 있는 것 같았다. 즉시 단안을 내렸다.
“보사부장관으로 하지.”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수원 근처에 이르렀다. 전 대통령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네. 오늘 나하고 한 말은 누구에게도 하면 안 되네. 서울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청와대 보좌관들이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알려고 할 거야. 절대로 발설하지 말게. 알았나? 그러면 이 정도로 끝내고 물러가게. 저쪽 칸에 장관들과 수행원들이 있는데 혹시 물어보면 국회대책과 시국 이야기했다고 말하게.”
나는 놀랐다. 전 대통령이 겉으로 보기엔 보스기질만 있는 것 같지만, 권력의 속성을 알아서 세심한 부분까지 주변을 잘 관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수행원 칸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왔어요?”
이웅희 문공부 장관과 이한동 총재비서실장이 묻는다.
“아니, 대전 들르는 길에 각하가 잠시 보고 가라고 해서 국회사정과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 좀 했지.” 시치미를 뚝 뗐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재형 대표에게 전 대통령의 지시를 전했다. 그리고 사후수습을 위해 당 대표와 원내총무, 둘은 남는다는 사실도 알렸다.
전 대통령은 개각과 더불어 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 있는 동서(김상구)까지 사퇴시켰다. 이런 극약처방에 가까운 조치를 내렸지만 시중에는 “정의사회 좋아하네!”라는 노골적인 반발 분위기가 생겼다.
▼ “좋은 일 한다는데 좀 도와주시오”… 張, 그 자리서 1000만원 수표 건네 ▼
장영자는 진짜 ‘큰손’
장영자는 정말 ‘큰손’이었다.
이철희, 장영자 두 사람이 결혼한 직후인 1981년 말 또는 1982년 초 어느 날(두 사람은 81년 겨울 전남 대흥사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뒤 82년 2월 서울 사파리 클럽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경북 달성·고령·성주가 지역구인 무소속 이용택 의원이 경주에서 이·장 부부를 만났다. 이 의원은 이철희가 중앙정보부 차장 때 그 밑에서 국장을 지낸 옛 부하 직원이었다.
이철희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의원, 요새 무슨 일로 그리 바쁘시오?”
“예, 제가 요즘 국회일 말고도 2차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희생된 우리 동포들의 진혼비를 세우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느라….”
“아!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이철희는 이용택의 태평양전쟁 희생동포 위령사업을 칭찬하면서 옆에 있던 장영자를 불렀다. “여보, 이 의원이 좋은 일을 한다는데 좀 도와주시오.”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영자는 핸드백에서 수표를 한 장 꺼내 급히 봉투를 만들었다. 이 의원이 집에 돌아와 봉투를 확인해보니 1000만 원이었다.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이 35만 원 안팎이었으니, 요즘 돈으로 치면 1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었다. ‘상식 밖의 거금’에 놀란 이 의원이 즉각 이철희를 전화로 찾았다.
“장군님, 위령사업에 헌금하여 주셨는데 너무 많이 준 것 같습니다. 혹시 수표를 잘못 주시지 않았나 싶어 확인차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시오. 그냥 쓰시오!”
이 의원을 통해 이 얘기가 퍼지자 전직 정보부 직원들은 너도나도 이철희를 찾았다. 이런 이유, 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종찬의 기억. “내가 정보부에 있을 때 이철희 장군은 나의 상관이었다. 무서운 상관이었지만 이 장군은 과장 가운데 나를 가장 신임했다. 그답지 않게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이 흥미를 끌었지만 나는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때라 그에게 예를 갖추지 못했다. 아마 찾아갔더라면 나에게도 금일봉을 줬을 것이고, 나 역시 왕년의 상관이 호의로 준 돈을 사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후에 어떤 곤욕을 당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정보부는 냉혹한 곳! 중정은 1982년 5월 5일 이·장 부부가 구속된 직후부터 대대적인 언론공작을 펼쳤다. 특히 정구호 사장의 경향신문은 ‘그림자 없는 인간-이철희 스토리’라는 제목 아래 ‘치부(致富)의 도구, 장 여인을 낚다’ ‘모친 장례에도 안 간 냉혈한’ ‘장막 속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기사를 내보냈다.
‘그는 지성미나 교양미보다는 백치미를 더 좋아했고, 유혹적인 눈길, 풍만한 몸매 앞에서는 오금을 못 펴는 색한(色漢)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식의 기사를 서슴없이 내보냈다. 누가 봐도 정보부가 흘린 자료를 그대로 베낀, 도저히 기사라고 할 수 없는 글이었다.
경향신문은 그 와중에도 장영자 또한 이철희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장영자는 이규광 장군의 처제였고, 이규광은 이순자 여사의 삼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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