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8일 ‘규제 기요틴(단두대) 민관합동회의’에서 153개 규제 개혁 과제 가운데 114개를 수용한 것은 결과만 놓고 볼 때 전례를 찾기 힘든 성과다. 하지만 과정을 들여다보면 한국은 아직 ‘규제개혁호(號)’라는 선박의 최종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한 과도기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 개혁과 수도권 규제 해소 같은 핵심 이슈에 손대지 않고 ‘숫자’에 치중한 성과를 내놓는 등 변죽만 울리는 방식으로는 국민과 기업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기 어렵다는 뜻이다.
○ 음식점도 벤처기업으로 인정
‘불필요한 규제를 단두대로 잘라내듯 없앤다’는 취지인 규제 기요틴 과제에는 관료들의 보신주의 등 때문에 규제 완화가 쉽지 않았던 비효율적인 제도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야구장을 프로야구단에 임대할 때 1년 정도의 단기로만 임대하고 매년 계약을 갱신하도록 한 제도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앞으로 야구장 등 지자체 소유 경기장을 25년까지 장기 임대할 수 있도록 해 기업들이 야구장을 ‘한국판 양키스타디움’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또 지주회사가 증손회사를 두려면 지금은 100% 지분을 보유해야 하지만 앞으로는 50%만 보유할 수 있도록 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계획관리지역 내에 공장을 세울 때 건폐율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이와 함께 정부는 음식점, 숙박업소라도 창의적 아이디어로 부가가치를 높이면 벤처기업으로 인증해 창업자금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감기약 같은 상비의약품을 콘도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농가가 달걀을 세척하지 않아도 이물질만 제거하면 유통할 수 있도록 허용키로 했다.
○ 수도권 규제도 정면 돌파해야 ‘규제 기요틴’
정부는 11월 20일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무역협회 등 8개 경제단체로부터 ‘규제 기요틴’ 건의 과제를 제출받았다. 이후 정부는 5차례에 걸쳐 비공식 민관합동회의를 열어 개혁 과제를 선별했다. 경제단체 건의 이후 38일 만에 전체 건의 과제의 75%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수용한 과제 중에는 과거 기업들이 수차례 개선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다양한 이유로 유지했던 18개 과제가 포함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반 국민의 의견 청취 과정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과제 중 석유판매업자가 건설 현장에 가서 덤프트럭에 주유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 등 일부는 안전과 직결되는 이슈여서 시간을 두고 깊이 있게 논의했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단기간에 많은 규제를 풀기로 했지만 핵심 개혁과제인 수도권 규제와 노동 개혁 과제는 이번 논의에서 제외됐다. 정부 당국자는 “수도권 규제는 수도권과 지방의 의견이 다르고 노동 문제는 노사정위원회에서 합리적 개선 방안을 마련 중인 만큼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 학교환경정화구역 내 호텔 설립 허용 등 이미 정부가 방침을 정해 추진해 온 과제들이 ‘규제 기요틴 수용 과제’로 분류된 것과 관련해 성과를 크게 보이려 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향후 개혁 방향과 관련해 강영철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장은 “모든 숨어 있는 규제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규제의 매듭을 일일이 푸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일단 모든 규제를 국민이 알기 쉽게 공표하면 시장에서 불필요한 규제가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고 이후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의 조치에 대해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국민들이 규제 개혁을 체감하게 하려면 정부가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 수도권 규제 등 이해관계가 복잡한 주요 이슈를 푸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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