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승헌]카터센터 ‘이석기 구명’ 팔짱낀 한국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31일 03시 00분


이승헌·워싱턴 특파원
이승헌·워싱턴 특파원
한국 정부는 틈만 나면 한미동맹을 홍보해왔다. 올해 7월 워싱턴에 부임한 뒤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도 ‘한미동맹의 굳건함’이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올 1월 “‘한 치의 빛(inch of daylight)’도 들어올 틈 없이 단결돼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한미동맹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최근 ‘카터센터’가 국가보안법상 내란선동 혐의로 서울고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구명 성명서를 낸 일을 곱씹어 보면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카터센터는 성명서에서 이 전 의원이 구속된 계기인 ‘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 모임’ 사건은 거론하지 않은 채 “국가보안법으로 유죄가 선고됐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우려한다”고만 했다.

이번 논란의 우선적인 책임은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카터센터 측에 있다. 하지만 무명 단체도 아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주도하는 단체가 이번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한국 외교’는 과연 성실하게 대처했는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성명서는 이 전 의원의 가족과 변호인들이 이달 초 카터센터를 방문해 구명을 부탁한 결과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카터센터가 있는 미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는 미 남부지역의 한미 동향을 맡고 있는 주미 한국총영사관이 있다. 그런데도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카터센터 성명서가 18일 발표됐다는데, 언론에 보도된 28일 그 내용을 처음 접했다”고 말했다.

이번 파문은 한국 외교부가 미국 내 오피니언 리더들을 상대로 한국 상황을 제대로 알리고 교감하고 있는지 묻게 만든다. 지난달 갓 부임한 41세의 마크 리퍼트 신임 주한 미대사가 트위터로 한국인들과 소통하는 ‘공공외교’를 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장면이다.

한국 외교가 해당국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즉 여론전에 약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일본군 위안부 이슈이다. 강공정책을 펴고 있는 한국 정부와 달리 미국 조야에선 ‘이젠 한국이 일본에 기회를 줘야 한다’ ‘더 늦기 전에 화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마디로 한국보다 일본 동조 여론이 높다. 이런 배경에는 일본이 학자 등 전문가집단을 내세워 미 오피니언 리더들을 상대로 세심한 여론전을 펼친 것과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일례로 일본 극우 성향의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9월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기획위원을 워싱턴으로 보내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한미연구소 방문교수, 래리 닉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등 동북아 전문가를 거의 비밀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은밀히 만나 일본 입장을 설명하는 로비전을 펼친 적이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론전에서 일본 기세에 눌려 있었다는 게 워싱턴 외교가에서 듣는 대체적인 평이다.

외교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동맹국 저변의 민심을 얻기 위한 치밀하고 장기적인 액션플랜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한미동맹을 제대로 다지기 위해서라도 이번 ‘이석기 성명’사태가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승헌·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카터센터#이석기 구명#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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