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영화 ‘인터뷰’를 내려받아 보았다. 김정은과 북한에 대한 황당한 묘사와 허무맹랑한 스토리가 가끔씩 번득이는 북한에 대한 통찰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영화 곳곳에 드러난 한국인 비하 코드는 일본 자본이 만든 영화라 그런 거라고 이해해 보려 했지만 기분이 개운치는 않았다.
개봉하자마자 휴지통에 처박힐 영화를 북한 당국과 미국 대통령이 합작해 살려낸 것은 아이러니다. 해킹당한 소니픽처스가 영화 개봉을 포기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 위협에 굴복한 소니를 비난했다. 소니가 뒤늦게 공개한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인터넷에서 ‘대박’을 쳤으니 영화 외의 정치적 요소가 ‘인터뷰’를 흥행시킨 셈이 된다.
‘인터뷰’는 공개되는 순간 살아 움직이는 생물(生物)이 됐다. 북한 당국의 총력 저지를 뚫고 영화가 북한에 유입됐다고 하니 북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하다. 다른 한편, 영화 관람객 가운데는 나처럼 한국인으로서 모멸감을 느낀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황당무계한 코미디 영화 한 편이 국내에서 반일 감정을 일으키고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를 가져오고 대북 접근에 대한 한미 공조에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영화 장르야말로 가장 무서운 정치적 무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할리우드 스타 앤젤리나 졸리가 감독한 ‘언브로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육상선수 루이스 잠페리니가 겪은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미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 대해 일본 우익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식인(食人)장면이나 포로를 불태우는 장면 등 부정하고 싶은 과거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세계에 까발려지는 것은 불쾌한 일일 것이다.
우익의 이런 반응은 예상된 것이긴 하나 주목되는 점은 이들이 영화에 대해 적의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우익은 영화에서 포로수용소의 악랄한 감시관 와타나베 역을 맡은 자국 록스타 겸 배우 미야비에 대한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다. 재일동포 3세인 이 배우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공격 포인트다. 영화 ‘언브로큰’이 일본에서 개봉될지는 국제사회가 ‘아베의 일본’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때아닌 이념 논쟁은 한국 사회의 천박성을 드러낸다. 영화에 대한 평점을 보면 네이버 이용자는 10점 만점에 9점, 다음 이용자는 6.9점으로 뚜렷이 나뉜다. 파독 광부, 베트남전, 이산가족 찾기 등 배경이 된 시대를 놓고 유신 독재를 미화한다고 주장하는 진보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는 보수나 둘 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영화 메시지는 험난한 시절을 견뎌온 아버지에 대한 헌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메시지는 실종되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두고 정치적 해석만 난무한다. 영화에 대한 평가도 갈라지게 하는 우리 사회 이념 과잉은 불치병 수준인 듯하다.
2012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개봉 당시 광해군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며 보수 세력들은 영화 제작사인 CJ E&M을 두고 좌파권력과 손잡은 재벌이라고 매도하더니 이번엔 진보 진영에서 CJ가 이재현 회장의 사면을 노리고 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공격하고 있다. 영화 한 편이 흥행할 때마다 제작사가 좌파로 몰리기도 하고 우파로 몰리기도 한다.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작가로서의 변이었다. 우리의 경우 윤제균 감독이 “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할 정도니 상황이 많이 다르다. 새해 벽두 한반도와 일본에서 세 편의 영화가 그 나라의 수준과 국민의 톨레랑스를 시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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