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유리잔같이 깨지기 쉬운 실직 가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8일 03시 00분


자살하는 사람은 머뭇거린다. 대부분 한 번에 목숨을 끊지 못하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거나 마지막으로 치명상을 가해 죽는다. 이때 치명상이 아닌 자해로 생긴 손상을 주저흔(躊躇痕·주저한 흔적)이라고 한다. 서초 세 모녀의 살인범 강모 씨(48)의 손에도 자살을 머뭇거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죽였으나 제 손으로 자신을 죽일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강 씨는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컴퓨터 3D 디자인 업체 부장, 강남 11억 원대 아파트 보유, 혼다 어코드 보유’라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3년 전 사오정의 나이에 실직한 뒤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대출받아 매월 400만 원씩 아내에게 생활비로 준 것도, 고시원을 오가며 출근하는 행세를 한 것도, 아내가 실직을 눈치챈 뒤에도 딸들에게 계속 비밀로 한 것도, 동창회비로 매년 30만 원을 낸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는 실직을 만회해보려고 주식투자를 했으나 2억7000만 원을 날렸다. 그의 진짜 위기는 주식투자 실패로 직장을 계속 다니는 척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에서 왔다. 딸들에게도, 양가 부모들에게도, 동창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유서에 ‘막판에 왔다’고 썼다. 실직 상태에서의 2억7000만 원 손실은 대단히 큰 것이지만 막판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다. 11억 원의 아파트를 팔아 5억 원의 대출을 갚고 통장 잔액 1억3000만 원을 보태면 그에게는 아직도 7억3000만 원이 남는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죽인 뒤 차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충북 청주에 도착한 뒤 119안전센터에 전화해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자진 신고하고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목적지도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경북 문경에서 검거됐을 때 자신이 어디에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억새풀 같은 가장과는 판이한, 유리잔같이 깨지기 쉬운 이 시대 한 가장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몹시 씁쓸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실직#자살#서초 세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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