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건너편에는 포효하는 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화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 같은 애들이랑 얘기하기 싫다니까. 나는 VIP라고. 사장에게 연결해.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OOO 씨? 죽을래?”
“나보고 주소를 말해 달라고? 너 내 번호랑 주소 지금 안 떠? 야, 네가 한번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욕은 후렴구처럼 계속 붙었다.
12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정신생리검사(HRV)를 받으면서 들은 홈쇼핑 고객서비스센터에 녹음된 고객들의 실제 음성이다. 막말을 들으면, 누구나 기분이 나쁘다. 그렇다면 막말을 들을 때 우리 신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먼저 평상시 받았던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양쪽 손목에 측정기를 부착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이나 생활 습관, 성향과 관련된 질문 127개를 하나하나 보면서 답을 골랐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항을 접할 때 측정기에 기록되는 다양한 신체 정보다. 측정기는 자율신경계의 건강도와 심박동 변화를 감지한다. 또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신체 각성도도 측정해 준다.
기자의 평소 스트레스 정도는 꽤 높은 편으로 나왔다. 특히 불안도가 높았다. 다행스러운 건 흥분·긴장·분노 시 빠르게 증가하는 교감신경 활성도와 마음을 이완시키는 부교감신경 활성도 수치가 괜찮다고 했다. 스트레스에 대항하는 힘도 있었다. 이후 5명의 고객 불만 전화 내용을 연달아 들었다. ‘선물 보내려는 분의 주소가 잘못됐다’며 다시 알려 달라는 콜센터 직원의 말에 흥분한 ‘고객’이란 사람은 따발총처럼 욕을 퍼부었다. 직원이 잠깐 숨소리를 내자, 그쪽에서는 “네가 지금 비웃었느냐”며 호통을 쳤다.
‘내 일이 아니니’ 당황하지 않고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검사실이 추운데도 귓불이 뜨거워졌다. 남의 이야기였지만 심장이 쿵덕거렸다. 설문 문항이 화면에 나오고 있지만, 머리가 멍한 나머지 몇 번이고 다시 문장을 읽었다. 10분밖에 안 걸렸던 설문 문항 읽기가 20분으로 늘었다. 정석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자의 검사결과표를 보고 “교감신경 지수가 급격히 오르고 심박 변이가 감소했다. 정신적인 압박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의 서비스에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떼써야 얻는다. 소리 지르면 얻는다’라는 생각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거의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이 나라는 이제 갑질 한다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은 이미 벗어났다.
화가 날 때는, 내가 화내는 강도가 적정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백화점 직원의 무릎을 꿇릴 만한 사안인지 몇 분만이라도 생각해 보는 숨고르기를 하자는 거다. 막무가내 갑질에 시달리는 이 사회의 을들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들딸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갑질에 나선 사람의 부모나 자식 혹은 친지 누구라도 자신이 휘두른 것과 같은 횡포에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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