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과 석학들이 이번 테러에 대해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잇달아 내놓았다. 현지 일간지와 방송 인터뷰, 기고로 종합해 본 이들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 자크 아탈리(72) “세계화, 비극도 함께 가져와”
테러범들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인들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외계인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는 근대적 이성주의, 형제애, 톨레랑스(관용), 정교분리 원칙 같은 프랑스 공화국이 내세워 온 가치를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 시민이 왜 이런 짓을 하게 됐는지 우리는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회 통합에 성공하지 못했다.
우선 ‘침묵’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 프랑스인들은 모두들 종교와 신앙에 관계없이 함께 애도하고, 서로 웃겨주고, 풍자해야 한다. ‘조롱’과 ‘풍자’야말로 야만적 행위에 대한 최고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지난 50∼60년간 평화 속에서만 살아와 비극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세상에서 비극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화는 ‘비극’도 함께 가져왔다. 우리는 이제 비극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이 원하는 대로 ‘복종’하는 것은 결코 답이 아니다. 용기를 갖고 비극을 이겨나가야 한다. 테러리즘과 맞서는 우리의 선택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정권’ 때의 비굴한 모습을 반복할지, 런던에 있던 ‘자유 프랑스’ 정부의 모습이어야 할지를 보여주어야 한다.(프랑스 ‘쉬드라디오’ 인터뷰)
○ 에드가르 모랭(94) “다른 종교에 귀 기울여야”
이번 사건은 프랑스 공화국의 심장을 강타했다. 공화국의 이상인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이 침범당했다. 하지만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이 이슬람 신자들의 신앙에 모욕을 줄 수 있고, 예언자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자제심도 필요하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공항은 지하드(이슬람 세계를 확대하기 위한 성전·聖戰)를 위해 떠나는, 지하드에서 돌아오는 프랑스 무슬림 청년들로 분주하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향연이 프랑스 내부로 옮겨지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이 이제 프랑스에서 진행 중이다. ‘공포’가 기독교를 믿는 프랑스인, 아랍계 프랑스인, 유대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을 느끼면서 사회적 결속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독일, 스웨덴까지도 이슬람 혐오증이 번져가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즘과 비시정권하에서 행해졌던 ‘반(反)유대주의’ 폭력이 재연될까 우려된다.
이번에 전 세계 지도자들과 프랑스 국민들이 하나가 돼 나섰던 ‘공화국 행진’은 이러한 두려움에 질 수 없다는 문명인들의 응답이었다.(프랑스 일간 르몽드 기고)
○ 움베르토 에코(83) “2차대전과 같은 공포 엄습”
모든 이슬람교도를 ‘극단주의자’로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나치즘’이다. 세계 정복이라는 종말론적 욕망을 위해 인종 말살의 전술을 택한 사람들이다. 세계는 이미 새로운 양상의 전쟁을 시작했다.
파리 테러로 인한 공포는 2차 대전과 비슷하다. 나는 당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폭탄과 함께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나는 이미 30년 전에 기고한 글에서 앞으로 이민은 단지 공간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어 전방위로 확대된 ‘글로벌 이동’의 물결에 직면할 것이라고 썼다. 이민자들과 본토인들 간에 새로운 균형이 이뤄질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할 것이라고 이미 경고했던 것이다.
책을 놓고 무기를 드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보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지금은 기독교 성서와 꾸란(이슬람 경전)을 놓고 서로 학살을 하고 있다.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詩)’를 통해 이란의 최고 권력자로부터 사형을 선고(파트와)받지 않았는가. 현대사회는 책을 놓고 벌이는 일신교들의 거대한 전쟁을 맞고 있다. (총이 아니라) 책의 텍스트에 담긴 자신들의 사상을 상대에게 강요하려고 일으키는 전쟁 말이다.(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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