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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주제는 ‘배려’]<10>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에게
몸무게는 9kg이 늘었다. 여기에 노트북컴퓨터와 필기구 등이 담긴 4kg 남짓한 가방을 메면 어깨에 묵직함이 전해진다. 임신 30주 차, 8개월인 박경하(가명·30) 씨는 매일 이 무게를 떠안고 지하철과 버스를 탄다. 임신한 직장 여성이면 대부분 겪는 일상이다.
집을 나서면 긴장의 연속이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에 사람들이 계단에서 뛰기 시작하면 벽 쪽에 붙어 손잡이를 꽉 잡는다. ‘세게 밀려 중심을 잃으면 저쪽으로 넘어져야지.’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머릿속에선 어렸을 때 배운 ‘낙법 시뮬레이션’이 휙휙 지나갔다. 어렵사리 지하철을 타도 빈자리는 없다. 서울지하철 전동차엔 2013년 12월부터 두 자리씩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돼 있다. 가로세로 약 30cm 크기의 동그란 스티커에 ‘임산부 먼저’란 글귀가 써 있지만, 박 씨는 그 자리를 양보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좌석을 양보 받은 적이 두 번 있을 뿐이다.
앉아 있는 승객이 혹시나 실수할까 걱정해서였을까. 박 씨는 임신부인 줄 알고 양보했다가 아니어서 민망했다는 회사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보건소에서 받은 임신부 배지를 가방에 달았다. 임신부 배지는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붙어 있는 것과 모양이 같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회사 동료들도 모두 “처음 본다”고 했다.
박 씨는 자기 대신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여성이 초기 임신부이길 바랐다. 그러나 높은 굽의 롱부츠를 신고 다리를 꼰 채 커피를 홀짝이는 그가 임신부일 확률은 낮아 보였다.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한 중년 남성, 휴대전화로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청년도.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는 딱딱하게 뭉쳤다 풀리기를 반복하고 종아리는 땡땡해지며 붓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굵어진 다리를 들어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숨이 차 예전엔 뛰어가던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한두 차례 쉬었다 가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자궁이 커지면서 횡격막이 올라가 숨을 깊게 쉴 수 없는 터다.
박 씨는 임신 초기 지하철 끝에 있는 교통약자 보호석에 앉았다가 한 노인에게 “왜 여기 앉느냐”고 혼난 뒤 입덧이 끝날 때까지 택시를 타고 다녔다. 배가 부르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여전히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기란 쉽지 않았다. 박 씨는 “그러고 보니 임신부 배지를 단 임부를 본 적도 별로 없다”고 했다.
얼마 전 서울시가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이 더 눈에 띄게 색상과 디자인을 바꿀 방침이라고 밝혔다는 뉴스를 본 박 씨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론 ‘재수 없이 내 앞에 임신부가 섰다’며 마지못해 양보해주는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임신부 배지를 달고 있는 여성을 보면 조금만 배려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 씨는 지난주 한 중년 남성에게서 자리를 양보 받은 순간을 떠올리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배 안에 있는 아이가 살 세상이 아직은 따뜻하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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