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 팔아도… 서비스 없어도… 가격만 싸다면 ‘OK’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0일 03시 00분


[저성장시대, 달라진 소비]<上>감성 대신 이성적 선택
저성장 시대, 소비자가 달라졌다

《 한국 소비자가 변했다. 까다로운 서비스와 프리미엄 기능, 브랜드와 디자인을 추구하던 한국 소비자들이 더 싼 가격을 찾아 불편함을 감수하는 저성장 시대의 소비자로 변한 것이다. 본보가 리서치회사 ‘엠브레인 서베이24’와 함께 20∼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설문조사한 결과 모든 연령대에서 소비를 줄이고, 가격 대비 품질을 중시하며, 명품·디자인·서비스 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건을 고를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가격(48.7%)과 품질(40.4%)로 디자인(6.9%)과 브랜드(3.5%)를 꼽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명품을 드는 사람은 멋있다’는 데 동의한다는 대답은 5점 만점(매우 동의)에 2.3점에 불과했다. 소비를 할 때 사회적 체면(2.8)이나 애국심(2.8)은 주요 고려 요인이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가격 대비 성능을 중시하고, 가급적 소비를 하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직접 만들어 쓰는 선진국의 저성장형 소비 트렌드가 국내에도 뿌리내릴 것으로 전망한다. 본보는 3회에 걸쳐 새롭게 변한 한국 소비자의 모습을 조망할 예정이다. 》

회사원 김영찬 씨(32)는 지난해 난생처음 해외 직접구매(직구) 방법을 ‘연구’ 해봤다. 혼수용 TV 때문이었다. 한국 매장의 TV에는 김 씨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3차원(3D) 기능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고급 기능이 추가돼 있다 보니 최신 55인치 LG 곡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는 약 500만 원에 달했다.

처음에는 삼성과 LG전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직원가’ 문의를 시작했다. 그래도 예상보다 비쌌다. 해외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봤다. 관세와 배송비를 포함해도 250만 원 안팎. 김 씨는 “미국에서는 원하지 않는 기능을 뺀 제품으로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며 “배송과 관세납부까지 절차도 많아 2주 이상 기다려야 해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총알배송’이 없어도, TV 설치 기사가 와주지 않아도, 최신 프리미엄 기능이 없어도 한국 소비자들은 더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단, 가격이 싸다면. ‘지름신’(충동구매)과 ‘신상’(최신 상품)을 즐기던 감성 소비자는 사라지고 냉철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성적 소비자로 변한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소비의 가장 큰 가치로 떠올랐다.

김시월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의 가치관이 변하면서 직접 서비스에 참여해 가격을 낮추는 게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 싼 가격을 찾아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본보와 엠브레인 서베이24가 이달 13일 20∼59세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남보다 더 싼 가격에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답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서비스를 버리려는 소비행태가 가장 표면화한 것은 해외직구다. 해외 상품뿐 아니라 국산품도 싸다면 해외에서 산다. 배송대행업체 ‘몰테일’에 따르면 국산 TV의 해외 배송 대행 건수는 2013년 3000건에서 지난해 1만5000건으로 5배 증가했다.

지난해 4월 결혼한 최성일 씨(35)는 결혼 7개월 후인 11월에야 혼수 TV를 마련했다. 미국 최대 쇼핑 기간인 블랙프라이데이를 기다렸다 산 것이다. 결국 원하던 제품을 140만 원 이상 싸게 샀다. 최 씨는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 충동구매를 즐기던 김민희 씨(34)는 지난해 12월 해외 쇼핑몰에 영어로 e메일을 보내가며 원하는 ‘겐조’ 코트를 100만 원 싸게 샀다. 국내 매장에서 190만 원짜리 옷을 90만 원(배송비 포함)에 산 것이다. 김 씨는 “백화점에서 입어 보고, 전 세계 쇼핑몰을 검색한 뒤 할인쿠폰을 찾아내 해당 쇼핑몰에 e메일을 보내 원산지를 확인했다”며 “이후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관세 적용 문구를 인보이스에 넣어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한 뒤 물건을 받았다. 귀찮아도 싸게 사서 기쁘다”고 말했다.

○ 서비스도 필요 없다


유통업계는 국내 소비자들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고 말한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소비자들은 유명한 ‘스포일드 컨슈머’(서비스를 누리려는 소비자)로 대형마트에서도 ‘백화점식’ 서비스를 요구했다. 한국은 해외 유통업체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본보-엠브레인 서베이24의 설문 응답자 중 62.1%는 ‘같은 제품이라면 서비스를 받지 않고 더 싼 가격에 사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6년 6월 취항한 저가항공사 제주항공은 처음에는 ‘노(No) 서비스’를 내세웠다가 한국 고객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불만이 제기돼 중간에 간단한 식사나 삼각김밥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점차 ‘노(No) 공짜 기내식’으로 선회했다. 제주항공 관계자는 “서비스가 없는 불편함보다 항공료가 싼 게 좋다는 소비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주항공 비행기에서는 음식을 먹으려면 따로 사야 하고, 좌석에서 영화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항공사는 2006년 118억 원이던 매출이 2013년 4323억 원으로 급증했다.

○ 불편함도 즐겁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불편함 자체를 즐기는 소비자도 적지 않다. 해태제과의 ‘허니버터칩’을 구하지 못한 소비자들은 일본판 허니버터칩으로 불리는 가루비사의 ‘시아와세버터’ 과자를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해외직구한다. 정경원 씨(36)는 “지난해 12월 일본구매대행업체를 통해 두 박스에 배송비 포함 4만5000원을 내고 일본판 허니버터칩을 구매했다”며 “일본판이라도 먹어 보고자 직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엔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 H&M과 알렉산더왕의 협업 상품이나 맥도날드의 ‘해피밀 슈퍼마리오 세트’를 사기 위해 일찍부터 매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불편해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격이 싸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패션업체 관계자는 “요즘 줄을 서 있는 곳은 맛집 아니면 싼 곳뿐”이라고 말했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저성장 시대의 소비자는 가성비, ‘싼 데 만족감이 높다’는 가치를 추구한다”며 “소비자가 직접 정보를 수집하고 실행하는 번거로움을 거치지만 가치 추구의 과정 자체가 요즘 소비자들에게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염희진·최고야 기자
#발품#서비스#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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