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안드레이 란코프]유엔 인권결의안이 北 엘리트층에 주는 위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3일 03시 00분


인권 유린 ICC 회부 결의안… ‘체제붕괴땐 끝장’ 신호줄수 있어
감옥 갈 수 있다는 공포가 경제개혁 소극적이게 만들고
급변사태시 저항 부를 수도
‘조사는 하되 사면’ 약속 등 비상구 열어주는 것도 방법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지난해 11월 유엔 총회는 북한의 인권 유린 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 하는 내용의 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 인권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번 결의안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북한 엘리트 계층에 비상구가 없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역사를 살펴보면 집권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공산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부분 국가에서 공산주의는 한 발의 총성이 울리는 일도 없이 막을 내렸다. 공산당 엘리트 계층에 비상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유럽 공산당의 고급 간부들은 체제가 무너져도 엄격한 처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과 특혜를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생긴 15개 신흥국가의 현직 대통령 경력을 보면 정말 그들의 희망대로 됐다는 것을 증명한다. 현직 대통령 15명 중 소련 체제하에서 해당 지역의 공산당 최고 우두머리를 지낸 사람이 2명이다. 그리고 그런 우두머리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이 2명, 소련에서 고급 간부를 지낸 사람이 2명, 중급 간부 출신이 4명이다. 정치나 사업이나 최고 엘리트 구성을 보면 동유럽에서는 공산당 간부 출신이 압도적이다.

놀라운 것도 아니다. 공산당이 정치와 사회를 독점했던 국가에서 행정, 경영 부문에서 실제 일했던 경험자들은 당이 임명한 간부들뿐이었다. 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그들에게 도전하거나 대체할 세력이 없었다.

북한의 경우 노동당의 체제 위기는 통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동유럽과는 사정이 좀 다르다. 북한과 같은 분단국가였던 동독에서는 공산주의시대 간부를 맡은 사람들 대부분이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통일국가의 엘리트층에도 당 간부 출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당 간부들이 체제 유지를 위협할 수 있는 경제개혁에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옛 소련이나 중국 엘리트층과 달리 그들은 체제가 무너지면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생사가 걸린 문제로 여기기 때문에 개혁을 서두르지 않고 급변 사태가 발생할 경우 동유럽 당 간부들과 달리 투쟁할 가능성도 크다.

물론 그들의 공포는 과장된 것이다. 북한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인재 부족으로 상당수가 재기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도 공포가 극심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위협은 이 같은 공포의 심화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북한의 당 간부들은 민중에 대한 진압과 학살을 감행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북한 엘리트가 개혁을 더 과감하게 추진하고 위기 상황에서 유혈 진압보다 타협의 길을 찾기 바란다면 비상구를 열어주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반사면도 고려할 수 있다. 민주통일이 되면 남한정부와 입법기관에서 인권 유린에 대한 조사를 하겠으나 자동 사면되거나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약속해주는 것이다. 통일 이후 정치범수용소 관계자나 고문 관련자들이 정치와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조치할 순 있어도 단순히 당 간부라는 이유로 처벌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자유롭게 살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사면이 비도덕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주민 고통을 줄이고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비도덕적인 정책이라고 몰아붙일 필요가 있을까. 북한 독재시대에 옥사하거나 살해된 사람들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 그러나 타협을 통해 앞으로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 같은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흡수통일을 거론하는 자체가 북한을 자극하고 남북관계를 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사면에 반대할 수도 있다. 필자도 어렵고 혼란스럽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흡수통일보다 점진적인 진화를 선호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급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이런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로 볼 수밖에 없다.

통일을 덜 어렵게 만들고, 보다 아름다운 통일 국가를 세우고 싶다면 과거의 잘못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역사의 심판이란 재판소가 아니라 역사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andreilankov@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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