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영 씨(62)는 4자매 중 셋째다. 이들 자매는 외모뿐 아니라 사는 모습도 비슷하다. 이들 모두 젊은 시절 산후 조리도 제대로 안 하고,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호남지방 출신인 네 자매 모두 젓갈이나 짜디짠 반찬을 즐겨 먹는다. 일하면서 식사를 빨리 하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휴일에 가족끼리 먹을 때도 10분 만에 허겁지겁 먹는다. 이렇다 할 취미 없이 여가시간엔 누워서 TV를 보고, 평일엔 5, 6시간만 잤다가 주말엔 10시간 이상 몰아서 자는 버릇도 똑같이 닮았다.
특이한 점은 이들 네 자매 모두 ‘비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는 키 150cm대에 45kg 정도의 마르고 아담한 체격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난 뒤엔 70kg가 넘는 고도 비만으로 변했다. 몸무게가 늘자 무릎관절 질환도 달고 산다. 정 씨는 “우리 집 유전자가 살찌는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촌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며 “한집안에서 보고 배운 생활습관 때문에 비만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병 부르는 습관도 ‘유전’
정 씨처럼 한가족 내에서 비슷한 질환이 여러 명에게 나타나는 ‘가족력’의 경우, 선천적 유전만큼 중요한 것이 ‘후천적 유전’이다. 후천적 유전이란 가족들이 공유하는 음식, 운동, 성격, 일상생활 등 전반에 걸친 공통습관을 말한다.
식습관은 질병 가족력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후천적 유전인자다. 이행신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영양정책팀장은 “부모가 간식을 많이 먹는 아이의 경우,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간식섭취량이 80Cal 정도 더 많은 편”이라며 “잘못된 식습관으로 비만이 된 부모의 경우, 그 체형이 자녀에게 유전될 확률이 정상 부모의 자녀에 비해 6.6배 높다”고 말했다.
TV 시청 습관도 건강에 영향을 준다. 최근 미국의 건강정보 사이트 셰이프(SHAPE)는 ‘수명을 줄이는 생활습관 3가지’를 소개했다. 이 사이트는 “TV 자체는 해롭지 않지만, TV를 오래 보는 습관은 수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25세 이후 TV를 보는 시간이 1시간 지날 때마다 무려 21.8분의 수명이 단축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장시간 TV를 시청하는 것이 습관화되면 운동량이 현격하게 줄어 비만 등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TV 시청 습관도 가족들 사이에 유전이 된다는 것.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부모가 자녀의 TV 시청시간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TV 시청시간이 10분 늘어날 때마다 자녀의 TV 시청시간이 각각 약 0.1분과 2분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평일에 비해 일요일 부모의 TV 시청시간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대해 보고서는 “가족구성원이 한자리에서 TV를 시청하면서 부모의 습관이 그대로 자녀에게 옮겨지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 건강 가계도엔 ‘습관 대물림’도 표기해야
흔히 건강 가계도는 가족들이 가졌던 중증 질환들을 표시해 두는 도식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건강 가계도에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건강을 해치는 나쁜 습관’도 파악해서 적어 두면 ‘가족력’을 예방할 수 있다.
강재헌 인제대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유전자뿐 아니라 가족의 공통된 생활방식이 ‘가족력 대물림’을 만든다”며 “건강 가계도에 병을 부르는 잘못된 생활습관도 체크해 나쁜 습관은 의도적으로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점검해 볼 일상생활 특성’으로 ‘식사(양·횟수 및 시간·식단 구성), 운동(횟수·강도), 수면(시간·잠버릇), 가정 내 활동 특성(여가·휴식·청소 등), 직업특성(스트레스 정도, 육체노동 강도, 직장 위생상태)’ 등을 꼽았다.
‘습관의 변화’ 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식습관’이다. 이대일 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서부지부 원장은 “특정 질환에 대한 가족력이 있다면 과식·과음·과나트륨 3금(禁) 법칙을 세우고, 인스턴트식품으로 때워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 놓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은 하루 소금 섭취량이 13g에 이를 정도로 짠 음식을 좋아하는 편인데, 비만을 포함한 각종 질환의 원인이 되므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각종 성인병을 부르는 나쁜 ‘수면습관’도 고쳐야 한다. 수면습관은 심장질환에 영향을 준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애릭 프래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평소 6시간 미만 수면을 취한 여성은 그러지 않은 여성에 비해 심장질환을 야기하는 단백질 등의 수치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적정 수면시간(7∼9시간)을 지킨 사람에 비해 수면이 부족한 사람들은 동맥질환, 당뇨병, 뇌중풍(뇌졸중) 등 만성질환 발병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문병인 이화여대 목동병원 여성암병원 교수는 “유전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각종 질환들도 결국엔 생활습관이 발병 확률을 좌우한다”면서 “유전자의 대물림만큼이나 ‘잘못된 습관의 대물림’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 컴퓨터중독 우리 아이… 부모부터 돌아보세요 ▼
음주-흡연 등 중독도 대물림
“넌 누굴 닮아서 그러니?”
부모들은 자녀들의 나쁜 습관, 특히 중독에 관해 훈계는 쉽게 하지만 자신의 습관을 돌아보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컴퓨터 게임, 음주, 흡연 등 중독과 관련된 질환들 상당수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습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알코올의존증은 대물림되는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알코올의존증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의 경우 ‘부모가 알코올 문제가 있었다’는 응답이 66명으로 약 47%를 차지했다. 그중 ‘아버지’가 알코올 문제를 겪은 환자는 56명(85%)이다. 허성태 다사랑중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알코올의존증은 어려운 환경적 스트레스를 술로 풀어 보려는 태도 등이 유전되는 것”이라며 “부모의 알코올 남용을 보고 역으로 술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음주 습관이 그대로 자녀에게 대물림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흡연 습관도 대물림된다. 미국 퍼듀대 마이크 뷰올로 교수팀의 발표에 따르면 214명의 부모와 그들의 자녀 3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부모가 흡연자인 경우, 자녀가 흡연을 따라 할 확률은 23∼29% 수준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비흡연자인데 자녀가 흡연할 가능성이 8%인 것에 비하면 3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컴퓨터 중독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의 경우, 부모가 인터넷 서핑을 하는 시간이 10분 늘어날 때마다 자녀의 검색 시간은 2분 30초씩 증가한다. 또 부모의 게임 시간이 10분 늘어나면 자녀의 게임 시간도 2분씩 길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정재기 숭실대 교수가 발표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청소년의 인터넷 이용 행태’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 교수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컴퓨터 사용 행태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놀라운 사실”이라며 “부모들이 자신의 정보통신기기 이용 습관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유아기 시절부터 이용 습관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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