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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주제는 ‘약속’]<21>‘복사하기→붙여넣기’ 이제 그만
지난달 31일. 개학을 앞두고 마지막 주말을 맞은 초등학교 5학년 이동민(가명·12·경기 고양시) 군. 개학하려면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방학숙제엔 손도 대지 않았다. 선생님의 꾸지람이 두려워 잠을 설칠 법도 하지만 천하태평이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입맛에 맞게 요리해놓은 ‘과제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동민이의 올해 겨울방학 숙제는 부모와 함께 박물관이나 역사유적 중 한 곳을 찾아간 뒤 소감을 적어 내는 ‘체험학습기’와 지정 도서 3권을 읽고 독후감 쓰기. 동민이가 방학 기간에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제중학교 진학을 목표로 방학 내내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을 돌며 고3 수험생 못지않은 바쁜 일상을 보냈다. 학원 숙제를 하다 보니 박물관에 가거나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 동민이는 지난 주말 웹 서핑을 시작했다.
실제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5학년’이라고 치자 ‘5학년 독서록 베끼기’ ‘5학년 과학 마인드맵’ ‘5학년 일기 베끼기’가 줄줄이 떴다.
숙제로 지정된 5학년 권장 도서를 읽고 쓴 독후감을 찾아보니 분량과 형식도 다양하다. 남들이 고르지 않았을 법한 책을 고른 후 ‘복사하기’와 ‘붙여넣기’만 반복하면 된다. 체험학습기 과제 역시 예전에 찍은 사진에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에서 퍼온 감상글 몇 개를 이리저리 짜깁기하면 끝. 이렇게 동민이는 겨울방학 숙제를 반나절 만에 해결했다.
“남의 것을 허락도 없이 베껴 쓰면 좀 미안한 느낌이 들기는 해요.”
동민이도 죄책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는 저작권과 관련해 ‘남의 글을 베끼는 건 도둑질과 다름없다’는 글이 나온다. 방학 숙제 안내문에도 ‘베끼지 말고 스스로 하기로 약속합시다’ ‘인용할 경우 반드시 출처를 표시합시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정작 교육 현장에서 이 같은 약속은 말뿐인 게 현실이다.
숙제를 베껴 제출한 사실을 파악해도 교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실제로 지난해 학기 중에 동민이의 반 친구가 과학탐구 과제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게 들통 나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이의 어머니가 찾아와 “왜 우리 아이에게만 베낀다고 지적하느냐”는 항의를 받아야 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교사들이 과제물을 철저히 점검한다. 미국에선 초등학교 1학년부터 ‘남의 글을 베껴 제출하는 것은 범죄’라고 가르친다. 되도록 남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 자기표현을 쓰도록 유도하되 부득이하게 인용할 때는 인용부호와 출처를 명확히 하도록 가르친다. 이 같은 ‘사회적 약속’을 어기면 정학이나 퇴학 조치도 감내해야 한다.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베끼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돼 있지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는 게 현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복사하기 붙여넣기’ 습관이 학문 논문 표절은 안 된다는 약속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풍조를 낳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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