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인평]비전통적인 무형문화재 제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3일 03시 00분


악보에 충실한 서양음악… 스승 가락에 자신의 가락 넣어
창조적 발전시키는 전통음악
정부 심사는 창의성 배제한채 완벽 보존 여부에만 맞춰져
가얏고 음악에서 김창조 산조 하나만 남아있다면 이 얼마나 초라한 일인가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
“할머니, 옛날 얘기 하나 해줘.”

“어제도 해줬잖아, 이제 다 들려줘서 할 게 없어.”

“그럼 콩쥐 팥쥐 얘기 해줘.”

“지난번에 해줬잖아.”

“그래도 또 해줘.”

손자는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데도 또 해달라고 한다. 이것은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줄 때, 매번 똑같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할 때마다 새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이야기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하루는 ‘콩쥐가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를 자세히 묘사하고 다른 날은 ‘콩쥐가 새엄마에게 얼마나 구박을 받는지’ 자세히 이야기한다. 전통 음악에 이런 옛이야기처럼 다양하게 변하는 음악이 있다.

바로 즉흥성이 중요한 판소리와 산조 등이다. 그래서 즉흥성을 구사하지 못하는 소리꾼을 ‘사진소리쟁이’라고 한다.

“그 사람은 사진소리쟁이야.”

“그 사람 오뉴월 묵은 소리 섣달그믐까지 간다지?”

만약 소리꾼이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당장 소리판을 떠나야 할 만큼 치명적이다.

‘사진소리쟁이’란 선생에게 배운 그 소리를 사진처럼 그대로 노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오뉴월 묵은 소리 섣달그믐까지 간다’는 할 때마다 똑같은 선율로 소리 하는 걸 이르는 말이다. 소리꾼은 청중의 반응을 살피며 노래한다. 청중에 젊은 사람이 많다면 사랑가를 자세히 길게 노래하고, 나이 지긋한 분이 많은 곳이라면 심청의 효성스러운 행동을 자세히 묘사할 것이다. 보통 두세 시간 걸리지만 시간이 없다면 한 시간에 춘향가 한 바탕을 다 부를 수도 있고, 느긋하게 즐기자면 몇 시간도 할 수 있다. 고 박동진 명창은 9시간을 노래하여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전통음악을 공부할 때, 처음에는 선생의 가락을 착실하게 공부하지만 선생의 가락을 다 배우고 나면 혼자서 공부하는 독공(獨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독공은 산속의 토굴 또는 절에 들어가 수행하였다.

음악성이 출중한 사람일수록 선생에게 배운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독공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배우지 않은 가락, 처음 듣는 가락이 튀어나온다. 이런 상황은 서양음악 전공자들은 상상을 못 한다. 만약 서양음악 피아니스트가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고 다르게 치면 이것은 ‘틀린’ 연주로 실격감이다. 그래서 국악 쪽에서 보면 피아노 소나타는 사진소리이다.

제자가 선생의 가락에 자신의 가락을 더 넣은 것을 ‘더늠’이라고 한다. 즉 기존 가락에 ‘더 넣어 만든 새로운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이를 득음(得音)의 경지라고 한다.

가얏고 산조는 100여 년 전에 김창조라는 분이 처음으로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후 제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 유파이다. 김창조 이후 강태홍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김종기류, 김죽파류, 성금연류, 심상건류, 최옥산류 등의 유파가 나타났고 가얏고에서 거문고 대금 해금 아쟁 피리 퉁소 등으로 확산되었다.

전통음악계는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제도에 관심이 아주 많다. 무형문화재라면 쉽게 말하면 인간문화재 제도이다. 무형문화재 심사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전통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김죽파류 가얏고 산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사람은 김죽파 선생이 살아생전 연주하던 음악을 잘 보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선생의 것을 완벽하게 보존, 재현해야지 창의성을 발휘하여 만들면 안 된다.

만약 선인들이 보존만 하려고 노력해 왔다면 오직 김창조 가얏고 산조 하나만 남아 있고 다른 산조는 출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가얏고 음악에서 김창조 산조 하나만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 가얏고 산조가 없다면 이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전통음악 분야의 무형문화재 심사에서 보존 능력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지극히 비전통적인 방법이다. 보존 능력과 함께 새롭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능력을 심사하는 투 트랙(two track)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전통음악이 설 추석에만 듣는 명절 음악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늘 들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음악으로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
#무형문화재#즉흥성#소리꾼#사진소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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