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5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 제조업체 사장 김모 씨는 최근 느닷없이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김 씨는 지난 30년간 오직 집과 회사만 오가며 회사를 키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요즘엔 진작 회사의 상속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회사를 처음 세울 때 액면가 5000원(주당)이던 주식 가치가 70만 원으로 높아졌고 김 씨의 지분가치도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 때문에 자기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인 20대 중반의 아들이 수십억 원에 이르는 상속세를 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아들도, 김 씨 자신도 이런 상속세를 낼 현금이 없다. 방법은 이 회사를 제3자에게 팔거나 아들에게 지분을 물려준 뒤 아들이 금쪽같은 회사 자산이나 주식을 팔아 막대한 상속세를 내도록 하는 것뿐이다. 어느 쪽이든 순탄한 가업 승계와는 거리가 멀다. 김 씨는 “일이 바쁘고 그동안 정신이 없어 후계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결국은 세금폭탄을 맞고 가업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며 “상속 공제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업승계제도가 너무 까다롭다”고 하소연했다.
과거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충실히 한몫을 했던 창업 1세대들이 경영 일선에서 속속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가업 승계가 중소기업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작년 말 가업 승계를 다소 수월하게 해주는 상속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이후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의 법제도나 사회 분위기에서 중소기업을 자녀에게 온전히 물려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장 엄청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건실한 기업이 갑자기 흔들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데다 사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찾는 것도 힘들다. 가업 승계를 ‘부(富)의 대물림’으로만 보는 사회의 삐딱한 시선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 “상속세 내면 경영 흔들” 30년 흑자기업 스스로 문 닫아 ▼
제도의 벽에 막힌 가업승계
어려운 가업 승계 여건 때문에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멀쩡한 흑자 기업이 폐업하는가 하면 지분을 팔아 상속세를 내느라 경영권을 잃거나 상속세 부담이 없는 해외로 본사를 옮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국가 경제의 측면에서 보면 고용이 줄고 장수 기업의 명맥이 끊기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어떤 경제적인 위기 상황도 잘 극복해온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정작 가업 승계라는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져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상속세 피하려고 사업 줄이고 해외로 탈출
봉제인형 제조업체인 A사는 창립 이후 30년간 흑자 경영을 유지한 중견 기업이었다. 자체 테디베어 제품을 미국에서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했지만 2009년 창업주가 스스로 회사 문을 닫았다. 가업을 이을 자녀들이 승계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속세를 내면서 회사를 물려받자니 향후 경영에 차질이 생기고 심지어 부도 위험마저 있던 상황. 자녀 승계를 포기한 이 회사의 창업주는 전문경영인도 수소문해 보고 매각 절차도 알아봤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결국 30년간 일궈온 가업은 맥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업 상속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을 위해 정부는 상속가액(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금액)을 깎아주는 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그런데 공제액이 적고 요건도 너무 까다로운 게 문제다.
현행 상속세법에 따르면 창업주가 매출액 3000억 원 미만인 기업을 자녀에게 물려줄 때 상속가액에서 최대 500억 원을 공제받을 수 있다. 하지만 피상속인(창업주)이 10년 이상 해당 기업을 경영해야 하고 상속인(자녀)도 상속 전에 2년 이상 가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또 자녀가 여럿이라도 한 명에게만 가업 재산을 몰아줘야 공제가 가능하다.
사후(事後) 관리 요건은 더 엄격하다. 상속 후 10년 동안 고용을 매년 기준 인원(상속 직전 2개연도 종업원 수의 평균)의 80%, 10년 평균으로 100%(중견 기업은 120%)를 유지해야 한다. 또 자산을 함부로 팔아도 안 되고 업종을 바꿔도 안 된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따라 기업이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막아 놓은 꼴이다.
이런 까다로운 규정은 실제 기업의 가업 승계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30년 업력의 장식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B 씨는 수년 전부터 회사 경영에 참여해온 장녀를 후계자로 정하고 지분을 물려줄 계획을 세웠다. 딸은 급여소득밖에 없어 세금 납부를 위해서는 상속공제제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 다행히 기업 매출액, 상속인 경력 등 다른 조건들이 잘 맞아 공제 혜택을 받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속 후 10년 동안 업종을 바꾸면 안 된다는 규정이 B 씨의 발목을 잡았다. B 씨는 “10년이 지나기 전에 지금 하는 업종이 사양(斜陽)산업이 될 가능성이 큰데 사업 전환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라며 “공제 혜택을 받는 게 도리어 경영의 족쇄가 될 것 같아 상속 자체를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사업 규모를 줄이는 황당한 일도 발생한다. 수도권에 있는 매출액 4000억 원 규모의 중소기업 사장 C 씨는 향후 자녀에 대한 가업 승계를 꿈꾸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업 확장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최근 가깝게 지내던 다른 기업체 사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가족들이 상속세를 마련하지 못해 회사를 매각하는 것을 보고 C 씨는 마음을 돌렸다. 20여 년 뒤로 상속 시기를 예정한다면 그 시기 매출이 대폭 증가할 경우 상속세 공제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는 사업을 키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기업들 상속세 부담 선진국보다 훨씬 높아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세법개정안을 통해 공제 대상 기업을 연 매출액 3000억 원 미만에서 5000억 원 미만으로 넓히고 고용 유지 등 사후 요건도 완화하는 내용으로 법 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부자 감세’라는 야당 등의 반대에 막혀 작년 말 국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지금 새누리당 강석훈 의원 등이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상속세 부담 완화를 재추진하고 있지만 국회 통과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2013년 말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업 상속·증여세가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기업이 ‘일시적인 경영난 발생’(30.0%)을 꼽았고 ‘사업 축소’(24.3%), ‘폐업이나 도산 초래’(11.0%) 등이 뒤를 이었다. 또 가업 승계의 주된 어려움으로 가장 많은 기업이 ‘상속·증여세 등 조세 부담’(71.7%)을 들었다.
한국경제연구원 정승영 선임연구원은 “국가 세수(稅收) 비중을 보면 상속세 및 증여세가 전체의 2%밖에 안 되는데 중소기업들은 상속세 부담 때문에 폐업까지 하는 상황”이라며 “이 때문에 중소기업 고용이 줄어들고 법인세가 덜 걷힌다면 현재의 세제를 개선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외국과 비교해도 국내 기업들의 상속세 부담은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한국은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26%의 두 배 수준이다. 또 한국과 비슷한 기업상속세 제도를 갖고 있는 독일 영국의 경우 세제 혜택을 받는 데 있어 기업 규모나 상속인 등에 대한 까다로운 조건이 없다. 아예 상속세를 폐지한 국가(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 등)나 세율이 낮은 자본이득세로 대체한 국가(캐나다 호주 스웨덴 등)도 많다.
이런 차이점을 이용해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본사를 아예 해외로 이전하는 중소기업도 있다. 매출액 7000억 원 규모의 한 중소기업은 최근 고민 끝에 회장의 아들 중 한 명이 상속세가 없는 캐나다로 이민 가는 방법을 택했다. 회사 사업을 캐나다 쪽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기업 전략을 선회한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되면 세금을 내기 위해 상속받은 지분을 팔고 경영권은 고스란히 뺏기는 수밖에 없다. 국내 중견 종자업체인 농우바이오, 세계 1위 손톱깎이 메이커인 쓰리세븐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업 상속에 대한 기업인들의 고민이 깊어지다 보니 이들 중 상당수는 ‘편법 상속’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 해외이전하고 ‘땅굴파기’ 편법 승계… 稅收구멍 더 커져 ▼
수도권에서 섬유업을 하는 조모 씨(72)는 3년 전 회사 경영권을 지인 D 씨에게 넘겼다. D 씨는 실제 경영도 하고 서류상으로 어엿한 이 회사의 주인이다. 하지만 D 씨는 조 씨가 내세운 ‘바지 사장’일 뿐 땅과 공장의 실제 소유권은 여전히 조 씨가 가지고 있었다. 이후 조 씨의 아들은 또 다른 회사를 차렸고 D 씨는 그 회사로부터 물건을 사며 매출을 일으켜 줬다. 조 씨는 수년 동안 이런 방법을 통해 아들 회사를 키웠다. 조 씨는 아들에게 회사를 상속하는 대신 편법으로 자신 회사의 자금을 아들 회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조 씨는 “이 바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 씨의 편법은 중소기업인들 사이에서 ‘모자 바꿔 쓰기’ ‘땅굴파기’ 등 다양한 은어(隱語)로 불린다. 겉으로는 티 안 나게 재산을 몰래 이전한다는 뜻이다. 특히 조 씨는 이 과정에서 바지 사장을 끼워 넣어 세무당국의 추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후계자 선정, 사회의 ‘삐딱한’ 시선도 골치
울산에서 현대중공업의 협력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 씨(58)는 아들과 최근 몇 년간 가업 승계 문제로 다퉜다. 당연히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 생각하고 돈을 들여 미국 경영학석사(MBA)까지 보내놨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는 기업 경영을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김 씨는 싫다는 아들을 억지로 울산에 주저앉혀도 봤지만 1년 내내 갈등만 겪다가 서울로 올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김 씨는 “새벽에 일어나고 가끔 주말에도 나오면서까지 회사를 챙기는 나를 아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며 “가업을 물려받아 손에 기름때를 묻히느니 차라리 취직을 하거나 공부를 더해 몸값을 높이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가업 상속을 앞둔 중소기업의 고민은 세금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로 자기가 회사를 물려받겠다고 자녀들끼리 싸우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골치를 앓고 있다. 경영 실패의 위험을 안고 선대(先代)의 사업을 물려받느니 높은 학력을 이용해 안정된 직장에서 경력 쌓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상속을 바라보는 사회의 ‘삐딱한’ 시선도 극복해야 할 문제다. 지난해 말 상속세법 개정안이 부결된 데에도 중소기업의 가업 승계 지원을 ‘세대간 부(富)의 무상 이전’으로 보는 비판적인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최근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을 계기로 오너 기업인들에 대한 사회 여론은 더욱 나빠졌다.
이 같은 여러 걸림돌 때문에 한국에서는 긴 세월을 견딘 장수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역사가 100년이 넘은 국내 기업은 동화약품 등 7개뿐이고 200년을 넘긴 기업은 하나도 없다.
반면 외국에서는 가족이 대를 이어 경영을 하면서 기업의 역사가 곧 ‘브랜드’가 된 명문 기업이 많다. 문을 연 지 200년이 넘는 기업만 해도 지난해 기준 57개국, 7212개사에 이른다. 일본이 3113개로 가장 많고 독일(1563개) 프랑스(331개) 등의 순이다.
이런 해외의 명문 장수 기업들은 후계자 선정에 가장 공을 들인다. 1668년 개업한 독일의 의약업체인 ‘머크’사는 15세부터 연령별로 후계자 양성 교육을 한다. 후계자와 관련한 의사 결정은 130명의 가족 주주로 구성된 총회와 이사회 등을 거친다. 업력이 약 130년에 이르는 중국의 소스 제조회사 ‘이금기’사는 오너 가족의 입사에 제한을 둔다. 대학 졸업 후 최소 3년간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일반 직원들처럼 입사시험도 거쳐야 한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장은 “가업을 승계할 시점이 되면 대부분의 기업은 성숙기에 접어들어 성장의 한계를 맞는데 이때 후계자가 기업을 이어받아 제2의 도약을 하지 못하면 쇠퇴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며 “가업 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기보다는 향후 기업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 달라는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