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나 중견기업도 가업 승계가 주요 경영 리스크다. 상속 및 증여 규모에 따라 가혹한 ‘세금 폭탄’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삼성, 현대자동차그룹 등 상당수 대기업이 순환출자 구조를 만드는 등 치열한 우회 전략을 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세계그룹은 가업 승계 과정이 가장 매끄럽게 이뤄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은 2006년 부친인 정재은 명예회장으로부터 ㈜신세계 주식을 각각 84만 주와 63만 주를 증여받았다. 당시 주가 기준으로 모두 합쳐 6900억 원에 이르는 규모다. 정 부회장 남매는 이듬해 3월 각각 ㈜신세계 주식 37만7000여 주, 28만5000여 주(합계 약 3400억 원)를 증여세 명목으로 국세청에 냈다. 최근 10년간 상장사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이 낸 증여세 중 가장 많은 규모다. 물론 정 부회장이 어머니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지분 17.3%를 어떻게 물려받을지는 미지수다.
LG그룹은 지주회사 체제여서 가업승계 방법이 간단한 편이었다. 1995년 구자경 현 명예회장으로부터 회장 자리를 이어받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지주회사 전환 과정(2001∼2005년)에서 1% 미만이었던 ㈜LG 지분을 10%대까지 늘렸다. 2004년 구 회장의 장남으로 입적된 구광모 ㈜LG 상무도 ㈜LG 지분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지난해 말에는 친아버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으로부터 190만 주를 증여받아 3대 주주(5.83%)가 됐다.
지주회사 체제가 아닌 다른 대기업들은 주로 순환출자 방식을 통해 그룹을 장악하고 있어 가업 승계 또한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특정 계열사 지분 확보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 지분 23.24%를 확보한 게 대표적이다. 제일모직(19.34%)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20.76%)에 이은 삼성생명의 2대 주주다. 삼성생명은 국민연금을 제외한 삼성전자의 최대주주(7.21%)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1994년 SK㈜와 SK건설로부터 비상장사였던 SK C&C 지분(현재 32.92%)을 대거 인수했다. SK C&C는 지주사인 SK㈜ 지분을 31.82% 소유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에서는 현대모비스가 가업 승계의 정점에 있다. 이 때문에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최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함께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대량 매각하면서 확보한 실탄으로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의 2013년 분석에 따르면 순환출자 구조를 가진 13개 기업집단의 81개 순환출자 고리 중 형성 사유가 ‘승계 목적’인 경우가 20개(24.7)%로 가장 많았다.
중견기업의 경우에는 여러 계열사가 얽혀 있는 대기업처럼 승계를 위한 ‘퍼즐 맞추기’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많게는 수백억 원에 이르는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는 게 어려워 가업 승계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높은 세금에도 불구하고 승계 관문을 슬기롭게 넘어선 중견기업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48년 설립된 출판업체 B사는 현재 4대째 가업 승계를 이어오고 있다. 매출액이 1300억 원대인 B사는 2009년 4세가 취임하기 전 상속세를 모두 냈다. 자금 출혈이 불가피했지만 이후 콘텐츠, 에너지 분야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매년 15%씩 매출이 성장하고 있다. 일찍 후계자를 선정한 뒤 경영과 실무 교육을 병행해 승계 이후를 충분히 대비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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