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예산에서 ‘그린카’ 연구개발(R&D) 신규 지원을 제외했다. ‘저탄소 녹색성장’을 강조한 이명박 정부가 2020년까지 세계 4대 전기자동차 강국을 만들겠다며 공들인 R&D 사업이지만 새 정권이 들어서자 사업이 쪼그라들었다.
R&D 정책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다 보니 정부가 바뀌면 연구과제도 정권의 ‘코드’에 맞춰 춤추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에 따라 ‘녹색’ ‘창조’라는 다른 이름이 앞에 추가로 붙을 뿐 사실상 같은 연구과제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또 연속성 없이 과제가 중단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힘만 쓰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노무현 정부는 미래형 자동차, 바이오 신약, 지능형 로봇 등 10대 성장 동력 확보를 국정과제로 추진했다. 하지만 녹색성장을 강조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R&D 투자 분야의 무게중심이 무공해 에너지, 그린카 등 22개 전략사업으로 옮겨졌다. 창조경제를 강조하는 현 정부는 13대 산업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무인항공기, 극한환경용 해양플랜트 산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연구소에서는 정권의 요구에 따라 연구 방향을 틀거나 이미 하던 연구와 같은 연구를 새로운 것처럼 진행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은 “사실상 기존 연구과제와 같은 것인데도 ‘창조’란 이름이 붙어 새 과제가 내려왔다”라며 “어떻게 달라 보이게 포장할까 고민”이라고 말했다.
정권마다 새 연구과제를 쏟아낸 결과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가 R&D 사업과제의 수는 1998년 1만3715개에서 2013년 5만865개로 15년 만에 3.7배로 늘었다. 정부 지원규모 기준 상위 7개 연구기관의 1인당 과제 수는 평균 6건이나 된다.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 일부 연구기관은 1인당 최대 연구과제 수가 30건이 넘는다.
연구기관들이 특정 분야에 천착하지 못함에 따라 연구의 파급효과를 보여주는 한국의 ‘고(高)피인용 논문’ 규모는 바닥권에 머물러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R&D 투자 상위 11개국 중 2002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의 고피인용 논문 점유율은 1.0%로 러시아, 대만에 이어 꼴찌에서 세 번째였다.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은 “정부가 R&D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다 보니 대학,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정부 과제에만 매달리고 있다”며 “연구과제의 기획부터 과감하게 민간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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