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와 사회부 기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왔다. 형사정책연구원장 시절이던 지난해 말에는 글을 청탁하려고 만난 적도 있다.
대법관 후보로 최종 낙점되었다는 보도가 나간 뒤 박 후보자가 그 흔한 위장전입 한 번 없이 공직자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에 비춰볼 때 청문회 통과에 별문제가 없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담당 검사 전력이 튀어나왔다.
그제(24일) 새정치민주연합이 박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열 수 없다는 것을 당론으로 확정했다는 소식이 들려 어제 전화를 걸었다.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솔직히 좀 당황스럽다. 나를 통과시켜 달라는 게 아니라 청문회라는 절차가 있으니 의혹이 있으면 국민들이 들을 기회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법부 공직자에 대한 검증 아닌가.”
그는 청문회 대상자가 청문회장에 서기 전에 언론에 공공연히 나서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접촉을 자제하고 있다며 조용히 청문회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알려졌다시피 박 후보자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한 1, 2차 검찰수사팀의 말석(末席) 검사였다. 87년 1월 1차 수사팀에 합류해 경관 2명을 기소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여주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전국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로 뜨겁던 5월 18일 ‘박종철을 죽인 진범 3명이 따로 있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발표가 있은 후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했고 박 검사도 다시 차출됐다. 그리고 경관 3명이 추가로 기소됐다.
사건 이듬해인 88년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고위층의 수사 압력을 문제 삼기는 했지만 수사팀에는 “수사를 잘했다”고 했다. 수십 권에 달하는 당시 국감 기록에서도 박 검사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많은 위원회가 설치되어 과거사가 파헤쳐졌지만 박 검사가 문제된 적은 없다. 오히려 문재인 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대통령민정수석으로 공직자 검증을 담당하고 있던 때 노무현 정부로부터 홍조근정훈장까지 받았다(본보 25일자 보도).
현재 야당 내에서 청문회 거부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일부 친노 386 의원으로 확인된다. 새정치연합의 한 의원은 “그제 회의에서 지도부조차 청문회를 하자고 했지만 일부 386 의원이 ‘한국 현대사에서 박종철 사건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이자 다들 아무 소리를 못했다”고 전했다.
야당의 청문회 보이콧은 국민 알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다. 한 미국계 회사 최고경영자(CEO)는 “의혹이 있다면 청문회를 열어 밝히면 되는데 일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미국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말로는 ‘민주’를 말하면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만든 제도를 쉽사리 흔들어대는 친노 386들의 행태는 역하다. 자기편과 상대방을 진영으로 가르고 자기편이 아니면 무조건 나쁘다는 ‘흑백논리’와 실체를 무시하고 ‘거대 담론적 틀’을 만들어 상대를 비난하는 운동권 행태가 정치권으로 그대로 옮겨온 느낌이다.
기자도 그렇지만 검사도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역사적 현장에서 취재하고 수사한다. 박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후보자와 고교 동창인 한 서울대 의대 교수는 “실체와는 무관하게 사건을 맡았다는 것만 갖고 문제를 삼는다면 군사정권 시절 ‘연좌제’와 무슨 차이가 있나”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야당이 여론의 역풍을 맞을까 우려된다. 문재인 대표가 지도력을 보여 청문회를 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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