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하게 계획된 암살… 러 야권 “크렘린의 정치적 살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일 03시 00분


푸틴 정적 넴초프 괴한 총격에 피살… 옐친 정권때 부총리 지낸 개혁파
푸틴 집권이후 반정부 지도자 변신… 평소 “푸틴이 죽일까 두렵다” 토로
美-獨-佛서도 “잔혹 살인” 비난하자 푸틴, 직속 연방조사위에 수사 지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政敵)’인 러시아 야권지도자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55·사진)가 지난달 27일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해 러시아 정국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의 야권은 이 사건이 크렘린이 배후에 있는 ‘정치적 살인’이라고 주장하며 1일 오후 2시부터 “우리는 모두 넴초프다(We are all Nemtsov)”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추모행진을 벌였다. 넴초프가 사망한 모스크바 강 다리에는 수천 개의 꽃다발과 촛불이 수북이 쌓였고, 가로등과 난간은 그를 추모하는 사진과 편지 등으로 뒤덮였다.

넴초프는 27일 오후 11시 40분경 크렘린 궁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모스크바 강 다리에서 우크라이나 출신의 24세 여성과 함께 걷던 중 총격을 받고 숨졌다. 흰색 승용차를 타고 접근한 괴한들은 6발 이상의 총격을 가했고 그중 4발이 넴초프의 등에 맞았다. 넴초프는 반정부 성향의 라디오 방송 ‘에호 모스크비’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모스크바 강 다리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던 중 총격을 받았다. 1발은 심장을 관통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로 알려진 동행 여성 안나 두리츠카야는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러시아 초대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인 1990년대 후반 제1부총리를 지낸 넴초프는 친개혁 성향의 정치인으로 옐친의 후계자로 꼽혔던 인물이다. 2000년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대표적인 반정부 지도자로 변신했다. 2011년 변호사 출신의 야권 운동가인 알렉세이 나발니와 함께 푸틴의 장기 집권 시도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지난해 소치 겨울올림픽 부패 규모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한 보고서를 잇따라 폭로했다.

넴초프는 지난달 10일 러시아 주간지 소베세드니크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이 나를 죽일까 두렵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친(親)우크라이나 인사였던 그는 지난해 4월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분리주의자 반군을 직접 지원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넴초프를 몇 주 전에 만났을 때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공개하겠다’고 말했다”며 “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의 비난도 거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잔혹한 살인”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 정부에 공정한 수사를 벌일 것을 촉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비열한 살인”이라고 비난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넴초프는 지칠 줄 모르는 용감한 민주 투사였다”고 애도했다.

비난 여론이 급등하자 푸틴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연방조사위원회에 사건 수사를 지시했다. 푸틴은 28일 넴초프의 모친에게 보낸 전보에서 “비열하고 냉소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계획한 사람들이 반드시 법의 처벌을 받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방조사위원회는 “치밀하게 계획된 암살”이라며 러시아 군과 경찰이 주로 사용하는 마카로프 권총이 사용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정부 측에 의한 암살보다는 △이슬람국가(IS) 극단주의자의 도발행위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반군의 소행 △여성과 관련된 사생활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전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암살#러시아#크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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