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국회 통과]처음엔 찬밥, 결국 누더기 ‘기구한 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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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이 말하는 ‘나의 출생기’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2011년 6월 14일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나’를 처음 꺼내놓자마자 한 장관이 반박했다. “청탁이 아니라 건전한 의사소통으로 볼 수 있는 만남도 있어요.” 다른 국무위원도 “어디까지가 청탁 민원이고 어디까지가 의견 전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거들었다.

2010년 ‘스폰서 검사’ 사건 등 검사 관련 비리 사건이 잇따르자 김 위원장이 나를 끄집어냈다. 금품 및 향응을 제공받았지만 직무와 관련된 청탁의 대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공직자를 막으라는 특명이었다.

권익위는 2012년 8월 입법예고를 했지만 국회에 가는 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법무부는 ‘직무 관련성과 관계없이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공직자는 모두 형사처벌’하도록 돼 있는 원래의 내가 ‘과잉금지원칙’을 위배했다고 몰아붙였다.

법무부는 “새로 법을 만들지 말고 필요하면 기존 법을 개정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내게 사실상 사망 선고를 내린 셈이다.

검사 출신인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가 나를 회생시켰다. 2013년 7월 대가성이 없더라도 직무와 관련한 금품을 받으면 형사처벌한다는 절충안 덕에 난 국무회의 관문을 넘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도 난 내가 언론사와 같은 민간 영역도 규율할 ‘슈퍼파워’를 갖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간신히 ‘민의의 전당’에 온 나를 선량(選良)들은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해당 상임위인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들이 기껏 한다는 말이 “법의 적용 대상이 너무 넓고 위헌 소지가 있다”는 타박이었다. 부정 청탁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 여하튼 타박과 무관심 속에 4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상임위에 상정이 됐다.

내가 천덕꾸러기에서 신데렐라로 거듭난 것은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가 계기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안전과 국가 개조를 위한 첫 단추”라며 나를 치켜세웠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쏟아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에 반하는 집단으로 몰릴까 두려웠는지 의원들도 나를 언급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문제는 느닷없이 나의 관할 대상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나를 만들어 낸 어머니(김영란)나 나 자신은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KBS, EBS뿐만 아니라 언론기관은 다 포함돼야지요.” “그럴 것 같은데 길게 논의하지 맙시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다 넣어야지.” ‘봉숭아학당’을 방불케 할 두서없는 논의 속에 나의 덩치는 공룡처럼 커져갔다.

올해 1월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는 이성보 국가권익위원장까지 장단을 맞췄다. 언론 종사자를 포함시키자는 내용에 위헌적 요소가 적고 국회가 정책적으로 판단할 문제라는 데 동의했다.

그렇게 3일 본회의를 통과한 나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즉 김영란법이다. 원래 이름에서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라는 대목이 슬그머니 빠졌다. 1년 6개월 후면 난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 탄생 당시 들렸던 국민들의 환호가 그때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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