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만델라의 꿈, 이병기 실장의 현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6일 03시 00분


박성원 논설위원
박성원 논설위원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만델라의 일생을 기록한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 실장이 만델라의 삶에서 무엇보다 공감하는 키워드는 사랑과 포용이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명 높은 백인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무장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27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럼에도 석방된 뒤 보복 숙청 대신 백인들을 포용·용서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남아공 통합이라는 꿈을 이뤄냈다. 우리에게도 그런 통합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실장이 국가정보원장 취임 후 첫 식사를 구내 청소와 식당을 맡은 일용직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주말에 내곡동 청사 맞은편의 서울어린이병원을 찾아가 버려진 아이들을 보듬곤 했던 것도 사랑과 포용 차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용기다. 만델라는 용기를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1997년 황장엽 망명사건은 베이징 대사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거나 중국과의 엄청난 외교적 마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감행됐다. 요원들의 목숨을 건 공작을 시작한 이는 전임 이병호 1차장(현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이지만 시기를 확정하고 결행 명령을 내린 이는 당시 1차장 이병기였다.

세 번째는 겸손이다. 만델라가 “저는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천한 종”이라며 자신을 낮추었듯 이 실장은 좀처럼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일이 없다. 2004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천막당사도 전략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 실장이 아이디어를 준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자신은 “박 대표의 아이디어였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이 실장이 바통을 넘겨받은 박근혜 정부 3기 청와대의 현실은 만델라가 와도 쉽지 않은 난제들로 가득 차 있다. 경제는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만큼 저물가 저성장에 빠져있고, 정치는 비박(비박근혜)이 여당 지도부를 장악한 데다 2·8전당대회 이후 지지도가 오른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가 박 대통령과 일대일 ‘맞짱’을 뜨겠다고 벼르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한일수교 50년이 무색하게 과거사 부정으로 박 대통령의 선택지를 좁힌다. 북한 김정은은 연일 도발 위협을 높이며 통일대박론과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구상을 비웃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지율 30%를 겨우 웃돌 만큼 움츠러든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회복해 집권 3년차의 국정 성과를 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대화와 설득을 통해 지지·협조세력을 넓히는 게 관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 실장 취임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화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청와대가 변했는지는 박 대통령이 중동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9일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의해 판단될 것이다.

여전히 문고리 3인방 얘기가 나오거나 “정무특보단이 있는데 여당 대표나 야당 대표와 굳이 자주 만나야 하느냐”는 식이라면 소통을 다짐한 정무형 비서실장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지난 2년간의 ‘유폐된 대통령’의 이미지를 벗겨내는 것이 이 실장의 당면과제다.

이 실장은 2012년 대선 당시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위기에 몰렸을 때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며 유족들에게 사과하도록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도 5·16에 관해 “학술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쿠데타임이 분명하다”고 할 만큼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다. 야당에서까지 “소통을 중시하고 정치와 외교를 아는 사람”(박지원 의원)이라고 호평한 이 실장이 실제로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증명해 줬으면 좋겠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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