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일 오후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심명보, 박준병, 박철언 등 6인이 모였다. 민정계 중진협의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날 박태준 최고위원은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박 최고위원에 대한 청와대쪽 견제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음 날 아침 공화계 중진 김용환 의원을 만났다. 김종필(JP) 최고위원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내가 경선에 나서게 될 때의 반응도 궁금했다. 김용환 의원은 JP가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몇 가지 충고를 해줬다.
첫째, JP는 YS에 대해 상당히 실망하고 있으나 아직은 분명한 태도를 정하지 않고 관망 상태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우선 당내의 잠재적 이종찬 반대 세력들을 무마해야 한다. 의원들 사이에 섭섭해 하는 분위기가 많다.
셋째, TK가 일반적으로 이종찬을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YS 지지도 아니다. 이를테면 김윤환과 금진호는 확고하게 YS를 지지하고 있지만 김복동, 박철언은 철저한 반YS다. 그 사이에서 정호용은 관망세이지만 YS 지지로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정호용은 이종찬이 자기를 앞지른 데 대해 자존심이 상해 있다.
넷째, JP는 복잡한 심리구조를 갖고 있다. 좀더 정감 있게 접근해야 한다. “이종찬은 아직…”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친구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찾았다. 그에게 JP 설득을 부탁했다. 그는 가까운 시일 안에 자신의 시흥 별장에서 김종필, 김용환과 3자회동을 갖고 확실하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하고선 밤늦게 JP의 청구동 집을 찾아갔다. 그는 YS에 대해 몹시 불쾌해 하고 있었다. 마침 그날 아침 YS는 또 문제의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 자신이 중립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정권 재창출 때까지 노 대통령과 나는 한 몸이 돼서 간다는 말을 유념해 달라.” 결국 경선이란 형식에 불과하다는 발언이었다.
내가 이런 ‘들러리 경선’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자 JP는 4월 8일 청와대에서 만찬회동이 있다면서 “이번에는 다릅니다. 내가 그동안 참아 왔던 말을 하고 올 거예요”라고 다짐했다. 결심이 단단해 보여 기대가 됐다. 특히 그 무렵 노 대통령도 YS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YS가 과연 약속을 지킬 사람일까?’ ‘제3의 후보는 없을까?’ 그게 노 대통령의 고민이었다.
그런 낌새를 청와대 내의 YS 측근이 포착했던 모양이다. 그 측근은 급히 이만섭 의원에게 SOS를 쳤다. 노 대통령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사람은 이만섭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노태우-김종필 만찬회동 직전 이만섭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는 노태우와 대구 동향이었고, 나이도 같았다. 고등학교는 갈렸지만 이만섭도 한때 공군사관학교에 다닌 경력이 있다 보니 기본적으로 통하는 사이였다.
이만섭은 대통령 접견실에서 나오면서 밖에 있던 이병기 의전수석비서관에게 ‘대통령의 마음을 돌렸다’는 사인을 보낸 뒤 청와대를 떠났다.
그날 오후 6시, JP가 청와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렇게 사전 정지작업이 끝난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은 JP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말을 돌렸다.
“새 인물을 내세우면 어떻겠습니까?”
단수가 높은 JP는 이 말이 성동격서(聲東擊西)임을 금세 알았다.
“새 인물이 나오면 5·16이나 10·26 같은 큰 소용돌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김영삼이란 사람은 돌파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정국의 대혼란이 와도 각오하시겠다면….”
대화 끝에 노 대통령이 본론에 들어가려 하자 JP는 만류했다.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말씀하지 마세요. 말이 또 새로운 말을 만듭니다. 알아들었습니다.”
JP는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 청와대를 나왔다. 그는 즉각 YS의 경선본부가 차려진 하얏트 호텔로 갔다. 이날 JP와 YS의 전격적인 회담을 두고 ‘4·8밀약’이라고 부른다.
한편 나는 그날 밤 오유방, 장경우 의원 등과 함께 노태우-김종필 회동의 결과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JP는 단호하게 할 말을 하겠다고 했는데 결과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는 청구동의 비서관에게 ‘도착하면 즉시 찾아뵙겠다’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너무 피곤하니 다음에 연락해주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판이 기울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조간신문에 JP의 발언이 실렸다.
“나의 결심은 내려졌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고 유보하겠다. 대선에서 승리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한다.”
나로서는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JP식 처세술인가? 아니면 세상을 내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발상인가? 5·16의 기획자였고, 한때 2인자의 위치에서 공화당을 조직한 사람이 할 말인가?
며칠 뒤 청구동을 다시 찾은 나에게 JP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현실이야. 꼭 최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차선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라요.” ▼ “현찰 1000억 대줄테니 신당 창당하시죠” ▼
박태준 회고록 속의 김우중
이종찬 회고록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을 때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있던 이종찬은 경기고 동기인 김우중이 보안사령부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강창성 사령관을 찾아가 구명을 호소한다(동아일보 2014년 10월 4일자 이종찬 회고록 제7회 ‘윤필용 사건과 김우중’ 참조).
그때 친구가 들려준 김우중의 ‘혐의’는 “윤필용 장군 측근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었다. 윤필용 측근들이면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등이다.
두 번째는 1992년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다. 이번엔 이종찬이 김우중에게 ‘JP 설득’을 부탁한다.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용환 의원과 김우중의 관계는 유명하다. “대우의 절반은 김용환이 키운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김우중은 김용환을 통해 JP와 3자 회동을 갖고 이종찬 지지를 부탁했다. 이종찬의 기억. “김 회장으로부터 ‘JP와 얘기가 잘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JP의 선택은 달랐다.
그해 개천절인 10월 3일, 김우중은 서울 북아현동 박태준(TJ) 최고위원의 집을 방문한다. 이종찬은 이미 경선을 거부하고 민자당을 탈당하고 난 다음이었다.
“현찰 1000억 원을 대줄테니 신당을 창당하시죠!”
TJ는 어이가 없었다. “김 회장, 이종찬 의원에게도 그런 제안을 했던 걸로 아는데 대우자동차 팔아서 그런 돈 만들 생각이면 회사 재무구조부터 고치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대우를 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004년 발간된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 나오는 얘기다.
김우중은 박철언 회고록에도 등장한다.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김우중 회장이 나를 꼭 한번 봤으면 했다.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있던) 나는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특별한 현안도 없이 재벌 총수를 만나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 차일피일 미뤘다. 그런데도 하도 끈질기게 만나자고 해 어느 날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에서 만났다. 만난 지 30분쯤 지나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김 회장이 황급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자 김 회장은 몇 차례 강권하다가 나중에는 ‘이거 사무실 직원들 회식비입니다. 작은 뜻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회식비까지 뿌리치는 건 너무 야박한 듯싶어 받아왔는데 사무실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직원 50여 명이 회식을 몇 백 번 하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박철언이 즉각 봉투를 돌려주자 김우중은 당황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79)은 대우그룹 워크아웃이 결정된 지 정확히 15년 만인 지난해 8월 26일 ‘대우특별포럼-김우중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통해 “대우그룹 해체 과정은 경영실패 때문이 아닌 정부의 기획해체에 가깝다”고 주장한 직후였다.
“나는 국가와 미래 세대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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