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만난 일본인 자매 관광객 기무라 아카네(35), 히토미 씨(31)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10초 넘게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가수 이름을 하나도 대지 못했다. “…씨엔블루? …잘 모르겠습니다.” “3년 전엔 케이팝이 정말 붐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좀….”
같은 날 폴란드인 관광객 야세크 코즐로프스키 씨(30)는 “‘강남스타일’ 열풍 때는 폴란드에서 싸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요즘엔 소수를 제외하면 케이팝 마니아가 없다”고 했다.
2011년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폴란드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를 물들였던 ‘소녀시대를 보고 싶어요’라는 팻말. 2012년 ‘강남스타일’ 신드롬. 3, 4년이 지난 지금 케이팝은 세계 어디서 숨쉬고 있을까.
본보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이 지난해 말 실시한 ‘제4차 해외 한류 실태조사 결과’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케이팝의 인기 확장세가 최근 크게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은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중동 아프리카 14개국에서 최근 1년 이내 한류 콘텐츠를 경험한 15∼59세 남녀 5600명이다. 케이팝 콘텐츠 이용량이 1년 새 늘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33.7%에 불과했다. 이용량 증가세의 둔화는 미래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미주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서 두드러졌다. 미주는 ‘1년 전보다 케이팝 콘텐츠를 더 많이 이용한다’는 응답자가 지난해 2월 조사에서 57.6%에 달했지만 9개월 만에 39.6%로 뚝 떨어졌다. 유럽(43.8%→29.3%), 중동(44.2%→13.8%), 아프리카(43.4%→31.0%)도 비슷한 추세였다.
케이팝은 새로운 활로 모색에 나섰다. 2000년대 태동(케이팝 1.0시대)과 2010년대 초반 절정기(2.0시대)를 지나 현재 3.0시대를 맞는 ‘케이팝호’는 외형보다 내실 다지기로 기수를 틀고 있다. ▼ IT 결합 홀로그램 콘서트, 식어가는 케이팝 부활 안간힘 ▼
태동-절정기 거쳐… 케이팝 3.0시대
2012년 샴페인이 터진 케이팝 2.0 시대 이후 지금까지 해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케이팝의 제2 본거지라 할 만한 일본 시장의 온도는 빠르게 식었다. 소녀시대, 카라가 일본 보통 여성의 이상형으로 조명받던 2012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일본 통신원 한도 지즈코 씨는 “요즘은 엑소와 샤이니가 선두에 서고 B1A4, BAP, 보이프렌드, 마이네임 정도가 소수 마니아를 형성했다”라고 했다. 도쿄외국어대를 비롯한 4개 대학에서 한국어, 한국 문화를 강의하는 그는 “카라, 소녀시대, 동방신기, 빅뱅, JYJ가 일본 전체를 흔들었던 2012, 2013년과 비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동방신기, 빅뱅 같은 ‘빅 네임’은 충성도와 그 지속성이 강한 일본 팬덤의 특성상 여전히 두꺼운 골수 팬층을 이어가고 있지만 케이팝 열풍을 끌고 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했다. “2013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본 미디어의 조명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케이팝은 점차 마니아 장르로 굳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기대했던 중국 시장이 활짝 열린 것도 아니다.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의 ‘해외 한류 공연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케이팝 콘서트의 7.5%만이 중국에서 열렸다. 공연시장에서 텃밭은 여전히 일본(69%)이다.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이 만연한 중국 음반·음원 시장에선 케이팝이 수익을 내기 어렵다. 케이팝 3.0 시대는 가시밭에서 재기를 꿈꾸는 것부터 시작되고 있다. 중국 시장, 약과 독 사이
YG엔터테인먼트는 중국의 QQ뮤직과 최근 업무 협약을 맺었다. QQ뮤직은 중국 거대 정보기술(IT) 기업 텐센트가 운영하는 현지 최대 음원 서비스 사이트다. QQ뮤직은 앞으로 YG 소속 가수의 앨범이 나오면 여기서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벌인다. 다양한 독점 부가 콘텐츠를 제공해 중국 내 음원 소비를 합법 시장으로 유도하는 효과도 노린다.
첫 타자가 마침 거물, 빅뱅이다. 빅뱅은 4월경 3년 만의 새 앨범을 낸다. 이는 ‘황허 강’에 잠길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케이팝의 해외 음원 수익은 그간 아이튠스에 의존한 반쪽짜리였다”면서 “QQ뮤직에서 매출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하면 중국 공략의 객관적 청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협상이 타결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현지 회사와의 합작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엑소의 중국계 멤버 크리스와 루한, 소녀시대 멤버 제시카의 팀 이탈 뒤에는 중국 시장과 자본이 있었다. 분신술 하는 케이팝
케이팝의 새로운 무대는 한국에서도 열린다. 서울 중구 을지로 패션몰 롯데피트인 동대문점 9층에는 세계 최초의 홀로그램 콘서트 전용관으로 불리는 ‘클라이브(Klive·300석 규모)’가 있다. 지난해 1월 문을 열었고 하루 4차례 공연한다.
홀로그램 콘서트에선 말 그대로 케이팝 가수의 가상 분신이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관람료는 3만3000원(청소년 1만6000원).
2월 25일 오후 6시, 이곳에서 싸이 2NE1 빅뱅의 홀로그램이 출연하는 콘서트가 시작됐다.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는 싸이 홀로그램의 허벅지에서 양감이 느껴졌고, 힘찬 군무를 하는 산다라박의 바지 주름이 출렁이는 입체감이 꽤 그럴싸했다. 인물의 채도가 사람보다 떨어졌지만, 입체적인 컴퓨터 그래픽이 무대 배경과 인물을 마법처럼 순간 이동시키고 섞어내는 효과는 실제 무대에서 볼 수 없는 거였다. 묵직한 입체 음향도 힘을 보탰다. 미리 찍어둔 관객의 얼굴 사진이 무대 위 가상인물의 몸 위에 합성되고, 그 얼굴에 빅뱅 멤버가 뽀뽀할 때 객석에서 탄성과 웃음이 터졌다.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조사에 따르면 한국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로 세계인들은 케이팝, 한식, 드라마와 함께 첨단 IT와 미용을 많이 꼽았다. 첨단기술과 케이팝이 결합된 홀로그램 콘서트는 이런 심리를 자극했다.
케이팝 홀로그램 콘서트의 기술과 콘텐츠는 해외 진출도 앞뒀다. SM엔터테인먼트는 4월 일본 나가사키 현의 테마파크인 하우스텐보스에 홀로그램 극장을 연다. KT는 5월 중국 저장 성 스마트 테마파크에 중국 업체와 홀로그램 콘텐츠를 공동 제작해 올린다. 케이팝 콘서트와 중국 역사 관련 홀로그램 작품을 함께 만드는 조건이다. 아직 시험 단계지만 한국에 머물고 있는 동방신기, 빅뱅이 분신을 만들어 해외 순회공연을 하는 게 가능해질 수도 있다. 미국의 한 홀로그램 제작사는 전설적인 로큰롤 가수 버디 홀리(1936∼1959)의 홀로그램 미국 전역 투어를 내년 계획하고 있다. 환상을 팔거나, 환상을 화장하거나
아이돌 스타가 팔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은 환상이다. SM엔터테인먼트가 1월 14일 서울 코엑스에 정식 개장한 복합문화공간 아티움에는 해외 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티움은 가수 관련 상품 매장, 실제 SM 가수와 똑같은 체험이 가능한 ‘SM타운 스튜디오’, 가수의 이름을 딴 음료와 디저트를 먹을 수 있는 ‘라이브러리 카페’, 홀로그램 공연과 실황 공연이 가능한 ‘SM타운 시어터’(770석 규모)로 구성됐다.
이날 아티움에서 만난 사이토 티나 양(19)은 “슈퍼주니어, 엑소 등 SM타운 소속 가수는 전부 좋아한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사진들도 많고 카페에서는 컵케이크를 먹었다. 다음에는 뮤지컬을 보러 올 것”이라고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홀로그램 콘서트의 가상현실에 사실적 체험을 결합했다는 게 이곳의 특징이다. ‘SM타운 스튜디오’에는 실제 음반 녹음이 가능한 스튜디오 2곳과 보컬 연습실, 춤 연습실, 뮤직비디오 촬영장, 화보 촬영장 2곳이 있다. 100%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사전 회의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 콘셉트를 정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체험할지 결정할 수 있다.
아티움 관계자는 “가수의 실제 녹음도 가능한 스튜디오 장비를 갖췄고, 실제 앨범 제작에 참여한 스태프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며 “SM 소속 가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앨범을 내는지 그 노하우를 집약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SM타운 스튜디오에서 팬은 전문가에게서 아이돌식 화장을 받고 스타의 무대의상을 입은 뒤 촬영할 수 있다. 외국인이 주목하는 대표 한류 코드 중 하나는 미용과 패션. YG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패션 브랜드 ‘노나곤’을 론칭하고, 화장품 브랜드 ‘문샷’을 선보였다. 소속 가수들을 대거 모델로 기용해 시너지를 노린다.
SM 관계자는 “아티움은 소속 가수를 좋아하는 팬들을 위한 일종의 테마파크”라며 “지금까지는 해외로 진출해 공연을 하고 콘텐츠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면 앞으로는 해외의 팬들을 국내로 끌어들일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YG는 지난달 경기도, 의정부시와 협약을 맺고 대중음악 공연·관광 시설을 갖춘 케이팝 클러스터를 2018년까지 경기 의정부에 조성할 계획이다.
케이팝 3.0 시대는 이처럼 해외 팬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파생 상품을 파는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만 이 전략은 큰 자본과 대스타를 지닌 기획사가 아니면 택하기 어렵다는 숙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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