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 드러낸 ‘천년 왕성’…경주 월성서 신라유물 대거 발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8일 16시 12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8일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 현장. 이곳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와 고배, 벼루, 뚜껑, 기와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8일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 현장. 이곳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와 고배, 벼루, 뚜껑, 기와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신라 파사왕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불렀다. 그 둘레가 1023보(약 1.9㎞)에 달했다’ (삼국사기)

‘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문헌으로만 전하던 천년 왕성(王城)의 역사가 우리 앞에 처음 속살을 드러냈다. 18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試掘) 현장은 30㎝ 깊이로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1000년 전 주춧돌(礎石·초석)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굴을 통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터 6곳과 담장터 12곳, 기와, 그릇, 등잔, 벼루 등을 발견했다.

본격 발굴에 앞서 ‘트렌치(시굴갱)’라는 얕은 갱도만 파는 단계인 만큼 관심이 쏠리는 정전(正殿) 등 핵심 전각(殿閣)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터 내 주춧돌이나 기단 대부분은 한눈에 봐도 거의 다듬지 않은 원석 상태였다. 5호 건물지에서만 동그란 주춧돌과 기다란 장대석 기단이 발견됐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왕궁의 전각에는 잘 다듬은 주춧돌과 장대석 기단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며 “토층을 더 깊게 파야 전각 터가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발굴팀은 8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시굴이 진행된 C구역의 석빙고 부근에 정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번 시굴을 계기로 C구역의 서쪽에 있는 A구역 쪽에 정전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팀 관계자는 “통일신라 이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각의 중심축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월성 시굴과정에서 발견된 건물터 6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 건물지.
월성 시굴과정에서 발견된 건물터 6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 건물지.
이와 관련, 길이 28m, 폭 7.1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3호 건물지)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적심 사이의 거리도 2m나 된다. 근처에서는 이 건물터와 평행선을 그리는 담장과 ‘ㄱ’자 모양의 배수로도 함께 발견됐다. 전체적으로 한 변이 훨씬 길쭉한 모양을 감안할 때 ‘회랑(回廊)’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박윤정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서민 주거지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회랑형 건물터는 이곳이 왕궁이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했다.

신라와 가야에서 제사용으로 쓰인 고배(高杯·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 등 신라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특히 일부 평기와에는 ‘習部(습부)’나 ‘漢(한)’과 같은 왕경을 구성한 6부(部)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마립간 시대 이전 신라 6부의 부족장은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기와에는 제작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의봉사년(儀鳳四年·서기 679년) 개토(皆土)’라고 적힌 명문도 함께 발견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다음달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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