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홍준표-문재인의 50가지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3일 03시 00분


독일인은 토론할 때 섹시한데 한국인은 벽창우가 된다
서로 “벽에 대고 말했다”고
근거를 대며 설득하기는커녕 ‘증거제시의 원칙’ 어긴 문재인
헌법 무시하고 포퓰리즘 공세
정책 논쟁 불가능한 여야… 개혁은 이대로 물 건너가는가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독일 사람들은 토론할 때 제일 섹시하다고 한다. 엄격하고 음울해서 일상 대화는 참 재미없지만 진지한 토론에 들어가면 뚜렷한 주관을 어찌나 논리정연한 말솜씨와 어휘로 펼치는지 광채가 난다는 거다.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결과’가 따라야 하는 독일어의 특징에서 비롯된다는 게 ‘독일, 내면의 여백이 아름다운 나라’에 나오는 말인데, 토론할 때 섹시는커녕 제일 벽창우가 돼 버리는 나라가 한국일 것 같다. 지난주 ‘전면 무상급식 중단’을 놓고 담판을 벌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서로 “벽에 대고 말하는 줄 알았다”지만 보는 사람은 울화통이 터졌다.

굳이 독일과 비교하자면 우리말엔 생략과 허사(虛辭)가 많다거나, 토론식 수업을 해본 적이 없다 같은 50가지 이유를 댈 순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법정토론 경험이 있는 변호사와 검사 출신이고, 국회의원의 기본기는 대화와 소통이어야 한다. 요컨대 세금으로 봉급 받는 두 공공조직의 대표가 공개토론을 할 적엔 상대는 물론이고 듣는 이를 설득해 갈등 해소를 꾀했어야 했다는 얘기다.

18일의 회동은 문재인이 “경남도의 무상급식 예산 편성을 촉구한다”며 경남도와 도교육청의 중재에 나설 뜻을 밝힘으로써 성사됐다. 그는 홍준표를 만난 자리에서 “논쟁할 생각 전혀 없다”고 강조했지만 의견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는 것이 바로 논쟁(論爭)이다. 논쟁의 목적은 싸움 아닌 합의이고 여기엔 규칙이 있다. 무상급식 폐지에 대한 잘잘못을 잠시 접어두고 규칙의 준수부터 따지면, 문재인은 실격패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논쟁을 제기한 쪽에서 증거 또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증거부담의 원칙’을 어긴 점이다. 회동을 제의한 문재인은 왜 무상급식 예산을 편성해야 하는지 근거를 댐으로써 홍준표가 꼼짝 못하고 받아들이게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는 “해법이 남아있는지 알아보려고 왔다”고 말해서 듣는 이를 기막히게 했다. 검사가 피고에게 범인이라는 증거를 내놓으라는 식이다. 홍준표가 “대안을 갖고 오면 어떻게 수용할지 (검토하겠다)”라고 한 것은 결정적 KO 펀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문재인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지난번 총선에선 부산 울산 경남지역 새정치연합이 3석에 그쳤지만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바람에 4월분부터 새로 급식비를 내야 하는 22만여 학생들의 학부모 중 상당수는 문재인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홍준표의 무상급식 폐지에 대한 여론조사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갤럽 결과는 ‘잘했다’ 49%, ‘잘못했다’ 37%지만 경남도민을 조사한 리얼미터 결과는 ‘잘못했다’가 59.7%다. 이 지역 새누리당 의원들이 떨고 있는 이유다.

그럼에도 논쟁이 남긴 그림자는 넓고도 깊다. 문재인이 훌륭한 심성을 가졌다지만 정치인으로서, 더구나 대통령으로서의 문재인은 여전히 불안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급식에 매몰돼서 교육 기자재 예산이 줄었다”는 홍준표의 말에 “조금 더 노력하면 교복까지 제공할 수 있다”라니, 운동화나 스마트폰은 왜 안 주느냐고 묻고 싶다.

자신의 주장이 충분한 증거에 의해 거부됐는데도 용기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는 더 위험하다. “2012년 헌법재판소에서 급식은 의무교육이 아니라는 결정이 나왔다”는 홍준표의 말에 그는 “의무교육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황당한 답을 했다. 자기들만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선 법과 제도, 헌법을 무시해도 된단 말인가.

‘아규멘테이션,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사회의 논쟁법’을 쓴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는 “사실관계와 가치관에 대해 대략의 동의가 없이는 ‘정책 논쟁’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밥보다 공부가 중요하다는 우파와, 실제로 밥을 굶기는 것도 아닌데 굶기면 안 된다고 굳게 믿는 좌파는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도 새삼 분명해졌다.

한국인에게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논쟁을 일삼는 전통이 있다는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의 지적은 더욱 두렵다. 조선왕조 창건 후 토지제도 개혁이 필요했는데도 의견이 갈리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해 400년을 방치했고, 민주적 대의제가 들어선 뒤에도 정당들은 주로 방해자 역할만 해왔다는 지적이다. 결국 공무원연금이나 노동시장 개혁도 하는 둥 마는 둥 할 게 뻔하다. 차라리 대통령의 ‘제왕적 의지’를 촉구해야 할 것인가.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홍준표#문재인#독일#토론#섹시#무상급식#증거부담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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