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연금-공공기관 개혁… 성공하면 총선서 공무원표 잃고
실패하면 국민에게 내세울거 없어
4월 다시 결집하는 옛 쇄신파들… 어떤 이슈로 새바람 몰고올까
신문을 펼치면 귀엣말을 나누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종종 보게 된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이기에 저렇게 은밀하게 속닥일까 싶어 호기심이 발동한다. 하지만 나중에 내용을 알고 나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달 24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취임 이후 처음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이 총리는 성과 부진 장차관에 대해 해임건의권을 행사하겠다며 ‘군기잡기’에 나섰다. 국무회의장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때 새누리당 원내대표 출신 ‘선배들’인 황우여 사회부총리와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귀엣말을 나눴다. “저거(해임 건의), 우리도 해당되는 얘기야?”
이번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던 지난달 2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경선 현장으로 가보자. 중국 외교부 고위 간부도 인정한 ‘글로벌 미인’ 나경원 의원과 ‘쇄신파의 좌장’ 정두언 의원 간 한판 승부였다. 두 의원은 연설을 마치고 나란히 앉았다. 그때 정 의원이 나 의원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경선 결과는 92 대 43. 나 의원의 압승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 정 의원이 나 의원에게 한 말은 뭘까. “난 외통위원장하려고 경선에 나온 게 아니야. 내가 이겨도 나 의원에게 양보할게.” 젠장, 이 말만 안 했어도 경선 패배 뒤 정 의원의 얼굴이 그렇게 굳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정 의원만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게 아니었다. 경선에 앞서 한 소장파 의원은 정 의원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형이 6.2 대 3.8로 이깁니다.’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거꾸로 예측할 수 있는지 나름대로 비상한 재주다. ‘쇄신파 의원’들은 이날의 참패를 ‘외통위 참사’라고 부른다.
정 의원은 늘 “정치인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알선수재 혐의로 2년여간 ‘정치적 암흑기’를 보내다가 극적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재기한 지 석 달 만에 경선판에 뛰어들었다. 더욱이 외통위원장에 관심도 없다면서 말이다. 무엇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을까.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왕의 형님’에게 맞서다 정 맞았다. 그러고도 살아남았다. 그냥 산 게 아니라 결정적 국면마다 판을 흔들며 ‘자기 정치’를 실현했다.
압권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서다. 2011년 11월 그는 가장 먼저 ‘박근혜 조기 등판론’에 불을 지폈다. 그의 주장은 다음 달 현실이 됐다. 이어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 기조를 뒤엎는 증세 법안을 내놓았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까지 ‘절대 불가’를 외쳤건만 그는 야당과 손잡고 ‘법안 쿠데타’를 감행했다. 2012년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종이 울리기 10여 분 전 법안이 통과되자 그의 머리엔 한 문장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것이 정치다!’
‘외통위 참사’는 새누리당 쇄신파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력은 쪼그라들고 구심점은 없다. ‘모래알 조직’이다. 정 의원이 조급해진 이유일 것이다. 다음 달 12일 정 의원을 비롯해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옛 쇄신파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이 정치권에 얼마나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여권 내의 팽배한 위기감은 이들에게 ‘기회의 문’이다. 총선을 앞두고 여권은 딜레마에 빠졌다. 공무원연금 개혁과 공공기관 정상화에 성공하면 여권은 든든한 우군인 공무원의 지지를 잃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개혁에 실패하면 내세울 게 없다. 2017년 대선 상황은 더 암울하다.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 세 야권 주자의 지지율 합이 여권 전체 주자의 지지율 합보다 2배나 높다. 여권 후보들이 하나같이 대선주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선 내수경기가 살아나길 두 손 모아 비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청년들을 죄다 중동으로 보내 투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결국 여권의 마지막 비상구는 정책과 공천 쇄신뿐이다. 그런 점에서 쇄신파의 재결집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소장파 ‘얼라들(아이들)’이 아니다. ‘포스트 박근혜’ 시대의 주역이다. 그들이 어떤 이슈로 어떻게 세력화하느냐는 한국 정치의 미래와 무관치 않다.
‘이것이 정치다’를 보여줄지, 결국 각자의 이익만 도모하다 지리멸렬할지 올해 정가(政街)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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