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코리아 3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받는 탈북민에서 주는 탈북민으로]<中>나눔으로 역경을 이기다
“학교에 가니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쌌다. 북한에서 왔다고 동물원의 동물처럼 나를 구경했다.” “그런 생활을 견디기 어려워 나쁜 길로 빠질 뻔한 적도 있다.”
2011년 어느 날, 고등학생 딸의 5년 전 일기를 몰래 꺼내 본 탈북민 최동현 씨(53)는 우두커니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딸이 이토록 힘들었다니….”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당시 일가족 21명을 태운 북한 배 한 척이 서해 바다에서 발견됐다. 신의주가 고향인 최 씨가 아내와 딸들, 처가 식구를 태우고 배를 몰았던 것. 서울 양천구 임대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던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전 3시부터 신문을 배달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는 택배기사로 일했다. 운전하다 졸리면 차창 밖으로 소리를 지르곤 했다. 2006년부터 택시를 몰았고 2009년 개인택시를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을 즈음 최 씨는 동료 기사들과 함께 탈북 청소년을 차에 태워주기 시작하면서 탈북 청소년의 현실을 깨닫게 됐다. “솔직히 탈북민이 적응 못하는 건 어른들 얘기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자살을 생각하는 아이들까지 있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제야 큰딸의 오래전 일기를 펼쳐봤고 무언가에 맞은 듯 머리가 멍해진 것이다.
“나부터 적응하려 정신없이 돈만 벌었죠. 딸들의 한국 생활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도 모른 채….”
그즈음 아내 순영옥 씨(50)가 일하던 서울 양천구 아동센터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탈북 청소년을 도와주는 곳인데 운영자가 떠나면서 존폐의 갈림길에 선 것. 아내는 아이들을 그냥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최 씨는 석 달을 넘게 고민했다.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도 버거운 택시기사인 내가 탈북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을까….”
그러다가 “내 딸들에게 진 빚을 탈북 청소년들에게 갚는 심정으로 돕자”는 생각이 스쳤다. 곧바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2011년 최 씨의 직함은 겨레얼학교(탈북 청소년 및 탈북 여성이 제3국에서 낳은 자녀를 위한 대안학교)와 지역아동센터(방과 후 학교 등 사회복지시설) 대표로 바뀌었다. 택시 운전은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심야 시간대로 바꿨다.
최 대표가 도와주는 학생의 상당수는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낳은 자녀들이다.
“이들은 정부의 정착지원 대상이 아니어서 더 어렵죠. 생계를 위해 돈 버는 엄마들이 아이를 돌보지 못하니 부산 대구 제주에서까지 아이들을 맡깁니다. 그런 엄마들을 보면 딸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아픈 기억도 떠오릅니다.”
최 대표가 돕는 아이들은 약 50명. 교사 10명 중 7명이 탈북민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편견에 힘들어하지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니는 초중고교에서 학급 회장 부회장을 맡고 학교 내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는 아이들이 늘었다. 처음엔 친구들이 신분을 알게 될까 걱정하던 아이들이 이젠 센터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놀이를 하기도 한다.
최 대표는 아이들이 ‘도움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기 위해 지난해부터 장애인복지관을 함께 찾았다. 올해는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일부 학생을 해외 의료봉사에 보낸다.
양천구 가로공원로의 겨레얼학교를 찾은 지난달 24일. 오후가 되자 아이들이 몰려들면서 학교가 시끌벅적해졌다. 최 대표의 팔과 등에 매달린 아이들은 떨어질 줄 모른다.
“택시운전 하는 탈북민이 아이들을 돕는다니 미련곰탱이 같죠?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나도 발전해요. 대한민국에서 사는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이러니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 대표의 웃음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
그의 꿈은 미래로 향한다.
“북한에서의 40년보다 대한민국에서 산 13년이 나를 훨씬 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어요. 나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통일이 됐을 때 평생 수령, 전투, 투쟁만 배운 북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한국을 이해하기 어렵겠습니까. 그들에게 인간을 변화시킨 자유민주사회의 매력을 설명해 주렵니다. 진짜 사랑, 배려, 나눔을 한국에서 배웠노라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