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8일 방문한 서울 서초구 양재대로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입구에는 은회색의 네모난 알루미늄 조각 수백 개가 벽에 걸려 있었다. 노창호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상무)은 “자세히 보면 색감이나 질감, 패턴이 모두 달라 제품에 적용했을 때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입구 안쪽에는 전자기기와 전혀 상관없는 선글라스, 촛대, 조명 등의 디자인 제품이 빼곡히 진열돼 있었다. 디자이너의 영감을 자극하기 위한 소품이었다.
LG전자는 국내 기업 중 최초로 디자인 연구조직을 설립했다. 1983년 세운 ‘디자인종합연구소’가 디자인경영센터의 모태다. 노 상무는 “1980년대 초만 해도 냉장고를 기획할 때 디자이너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손잡이’뿐이었지만 디자인이 제품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디자인의 역할도 확대됐다”고 말했다. ○ 디자이너가 제품을 기획한다
‘K(한국)-디자인’의 발전은 삼성전자, 현대·기아자동차, LG전자 등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정보기술(IT)과 자동차산업 기업을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정경원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디자인과 기술은 서로를 더 잘 돋보이게 하는 파트너의 역할을 한다”며 “특히 수많은 제품 중 군계일학이 되고 싶다면 디자인에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LG전자의 디자인 조직은 제품을 선제적으로 기획하기도 한다. 10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초콜릿폰’부터 2013년 ‘G2’ 스마트폰의 후면키, 올해 선보인 2개의 세탁기가 결합된 ‘트윈워셔’와 2개의 송풍기가 달린 ‘듀얼에어컨’ 등이 대표 사례다. 노 상무는 “디자인 조직에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심리학, 공학, 천문학 전공자 등 다양한 출신이 모여 있다”며 “심미안적인 것만 아니라 제품의 편리성과 혁신도 디자인 조직에서 나올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하반기(7∼12월) LG전자는 디자인 조직이 낸 주요 제품 원안을 다른 곳에서 바꾸려면 최고경영자(CEO)가 주재하는 회의를 통해야만 가능하도록 의사결정 시스템을 바꿨다.
○ 디자인이 제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스마트폰 ‘갤럭시S5’의 흥행이 부진했던 이유가 디자인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디자인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고객들에게 선택받을 수 없다”며 “‘갤럭시S6’와 ‘갤럭시S6엣지’는 디자인을 원점부터 다시 기획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디자인 혁신에 나섰다. 2001년엔 CEO 직속의 디자인경영센터를 조직했다. 지난해 말엔 유명 디자인 기업인 영국 탠저린의 대표를 지냈던 이돈태 전무를 영입해 글로벌디자인팀장을 맡겼다. 삼성전자 측은 “디자인의 영역을 제품 디자인에서 그래픽, 사운드 등 다양한 인터페이스 디자인과 플랫폼 전략 등으로 확대해 왔다”고 설명했다.
디자인 경영은 ‘브랜드의 힘’으로 이어졌다. 와인잔 형태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보르도 TV’는 삼성전자가 미국, 유럽 등에서 고급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갤럭시S6와 갤럭시S6엣지가 사상 최대 판매고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도 유리와 메탈로 이뤄진 외관이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 디자인은 정체성이다
1999년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한 이후 두 회사는 플랫폼(차체 뼈대)과 엔진 등을 공유하며 효율성을 높였다. 그러나 차별화가 필요했다. 답은 디자인이었다. 2004년 현대·기아차는 디자인 조직을 분리했다. 2006년 기아차는 ‘직선의 단순화’, 2009년 현대차는 ‘플루이딕 스컬프처(유연한 역동성)’라는 디자인 테마를 꺼내들었다. 특히 현대·기아차 디자인에서 사람의 코와 같은 역할을 하는 라디에이터 그릴은 각 회사의 디자인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다. 현대차는 헥사고날(육각형) 그릴, 기아차는 호랑이코(호랑이코와 입을 형상화) 그릴을 대표 디자인으로 내걸고 신차가 나올 때마다 이를 변형해 적용하고 있다.
지난해 현대·기아차는 완전한 디자인 독립을 이뤘다. 현대차와 국내 디자인센터를 함께 사용해 오던 기아차가 독립 건물을 갖게 되면서다. 그간 같은 대문으로 출입해 같은 품평장을 사용해야 했던 두 회사는 디자인 조직을 분리한 지 10년 만에 물리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돼 철저하게 ‘디자인 보안’을 지키고 디자인 정체성을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됐다.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기업들이 디자인산업의 발전을 이끌면서 2013년 국내 디자인산업 규모는 15조2285억 원으로 2012년보다 10.9% 증가했다. 국내 디자인산업의 경제적 부가가치는 89조 원으로 전년 대비 28.1% 늘었다.
정 KAIST 교수는 “디자인 경영은 제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사무실과 공장 인테리어, 건물의 외관, 직원들의 유니폼, 전시장 등에 모두 적용돼 기업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기업 문화까지 바꾸는 역할을 한다”며 “디자인 경영에 성공하기 위해선 패스트팔로어 정신을 버리고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것’을 창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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