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내일부터 11일 동안 남미 4개국 순방을 떠난다. 대통령이 해외순방이나 탄핵소추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도록 헌법은 명시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 의결 뒤 고건 총리가 대통령 직무를 대행했듯이, 내일부터는 이완구 총리가 세종시 아닌 정부서울청사에서 한 치의 국정 공백도 없도록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 이 총리에게 고(故)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2013년 4월 3000만 원의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자금을 건넸다며 “이완구 같은 사람이 사정 대상 1호”라고 말한 육성이 공개됐다. 사실이라면 정치자금법 위반에 해당되는 엄중한 사안이다. 이 총리는 사실이 아니라며 “(의혹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면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 내놓겠다”고 강도를 높여가며 강하게 부인했다.
물론 성 회장이 세상을 떠나 향후 기소 및 재판 단계에서 증언을 할 수도 없고, 아직 다른 목격자나 물증이 뒷받침되지 않아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긴 하다. 이 총리의 장담처럼 돈 받은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으면 섭섭한 감정을 품은 성 전 회장의 일방적 언급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을 준 시점과 장소 명목을 적시한 진술이 나온 만큼 이 총리는 피의자 신분을 면하기 어렵다. 뇌물이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에서 받았다는 사람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줬다는 사람의 진술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어제 새누리당 긴급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총리부터 조속히 수사하라”고 검찰에 촉구한 것은 총리 사퇴까지 거론되는 당내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이 총리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검찰은 신속한 수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재임 중 5억 엔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구속한 도쿄지검 특수부를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현직 총리가 검찰 조사를 받는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부패 의혹을 받는 총리가 ‘부패와의 전쟁’을 지휘한다는 것도 코미디다. 공직사회에서 영(令)이 설 리가 없다.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병기 비서실장 역시 대통령이 청와대를 비운 동안 내부 통솔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 총리를 이대로 두고 순방을 떠나는 박 대통령의 발걸음도 결코 가볍지 못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오른팔이라도 베어내겠다고 각오하고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공개적으로, 육성으로 보장해 줌으로써 검찰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이 총리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면 이제라도 사퇴해 본인과 박근혜 정부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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