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깻잎의 정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6일 03시 00분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20년 전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나는 강원도 한 산골 마을에서 대학생 농촌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며칠을 보냈다. 농활 행동수칙의 기본은 마을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 농사일이 처음인 우리는 일손을 돕기보다는 사고를 치는 순간이 더 많은 오합지졸이었다. 농사에 보탬이 되는 것보다 먹어 치우는 양이 더 많은 것은 금기 사항이었기에 다들 집에서 싸 간 쌀과 김치로 끼니를 때웠다. 푹푹 찌는 날씨에 설익은 밥과 쉬어 터진 김치로 육체노동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고3 수험생 생활보다 고역이었다.

그 대신 마지막 날만큼은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잔치를 하겠다며 학생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돼지고기를 마련했다.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할머니는 손주 같은 아이들이 기특하다시며 텃밭의 야채를 마음껏 뜯어다가 고기를 싸 먹으라고 하셨다.

남학생들이 불을 피우는 동안 나를 비롯한 여학생들 몇 명은 야채를 뜯으러 나섰다. 먼저 땅에서 옹기종기 돋아난 상추를 발견하고 신나게 뽑았다. 어라, 그런데 쌈의 필수 품목인 깻잎이 눈에 띄지 않았다. 온 땅을 뒤져봤건만 끝내 찾지 못했다. 마당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 깻잎이 없다고 외쳤더니 “천지에 널린 게 깻잎인데 무슨 소리냐”며 휘휘 텃밭으로 들어오셨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곡절인가. 할머니는 우리가 며칠 전 깨를 땄던 키 큰 줄기에서 이파리를 뜯어내시는 게 아닌가. 맙소사! 깻잎이 깨의 이파리였다니…. 생물 시간에도, 가정 시간에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당황했다.

그때 한 친구가 “얘들아, 여기 좀 봐. 파란 고추랑 빨간 고추가 한 나무에 같이 있어!”라고 외쳤다. 앗! 초록 고추와 빨간 고추는 (초록 사과인) 아오리와 (빨간 사과인) 부사처럼 다른 종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항상 야채가게에서 초록 고추와 빨간 고추가 따로 놓여 있는 모습만 봤으니 우리는 두 가지가 다른 품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가히 ‘무식함의 끝판왕’이었다. 할머니는 “대학생이면 똑똑한 줄 알았더니 한참 모자란 처자들만 모아놨구먼. 이런 것도 모르고 대학 다녀봐야 시집이나 가겠나”라시며 가뜩이나 휜 허리가 꼬부라질 지경으로 한참을 웃으셨다.

물론 우리도 고추나 깻잎에 아예 문외한은 아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나올 만한 내용은 알고 있었다.

고추에서 매운맛을 내는 성분은 알칼로이드의 일종으로 무색의 휘발성 물질인 캡사이신이라는 것, 깻잎은 카로티노이드의 일종으로 화학식이 C40H56인 베타카로틴이 많아 항암 효능이 있다는 것 말이다. 교과서와 참고서마다 ‘캡사이신’과 ‘베타카로틴’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가며 달달 외웠건만, 정작 깻잎의 본질은 몰랐다.

여름을 앞두고 문득 20년 전 낯 뜨거운 기억이 떠오른 것은 유치원에서 농장 체험활동을 갔다 흙투성이가 돼 돌아온 아이 때문이다. 제 얼굴보다 큰 상추를 한아름 안고 온 아이는 “오늘은 흙에서 상추를 뽑고 흙에다 고추씨를 심었어”라며 싱글벙글했다. ‘풋고추를 먹을 때 으레 손가락으로 탁탁 털어내던 그 하얀 걸 심으면 고추가 나는 건가?’라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강원도의 여름날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나마 요즘은 과거에 비해 자연관찰 책도 더 정교해지고, 동식물 관련 멀티미디어 학습 자료도 생생해져서 나처럼 무식한 아이들은 없을 거다. 그래도 자연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도시 아이들이 직접 흙을 밟고 씨를 심을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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