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희생을 기억하진 않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3일 03시 00분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6월의 주제는 ‘호국보훈’]<102>외면받는 순직자 명예

로비 한쪽으로 밀려난 순직자 명패 순직한 외교관들의 명패가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2층 로비 한쪽에 서 있다. 외교부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면 로비 한가운데 있던 이 명단의 위치가 왼쪽 끝으로 옮겨졌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로비 한쪽으로 밀려난 순직자 명패 순직한 외교관들의 명패가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2층 로비 한쪽에 서 있다. 외교부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면 로비 한가운데 있던 이 명단의 위치가 왼쪽 끝으로 옮겨졌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우리는 신성한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절대로 장병들을 적진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Don’t leave men or women in uniform behind)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난해 6월 탈레반에 인질로 붙잡힌 미군 보 버그달 석방 문제를 기자들이 묻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한국은 어땠을까. 첫 대규모 해외참전인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은 자국 외교관이 포로로 억류됐는데도 제대로 손쓰지 못한 채 5년을 보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면서 ‘내버려졌던’ 이대용 주베트남 공사 일행 얘기다. 육군 소장 출신의 예비역 장성인 이 공사는 안전하게 빠져나올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 교민이 모두 탈출하는 것을 확인한 뒤 떠나려다 낙오했다.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혹독한 찌호아 형무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과 살해·북송 위협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이들의 석방이 확정된 것은 1980년 4월 11일. 유대계 미국인 사업가 사울 아이젠버그가 베트남과 협상을 벌인 결과였다. 이들이 귀국길에 탔던 비행기도 한국 정부가 제공한 것이 아닌,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였다. 한국 정부도 인도 등에서 베트남과 협상에 공을 들이긴 했다. 하지만 ‘당신 뒤에 늘 한국이 있다’는 믿음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라를 위한 희생은 잊지 않는다’는 믿음도 충분히 주지 못했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2층 로비에는 임무 수행 중 목숨을 잃은 외교관 명패가 걸려 있다. 하지만 이들 40명이 어떤 현장에서, 어떻게 순직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라를 위해 일하다 목숨을 바친 사람의 명패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초라하다. 당초 로비 한가운데 있던 명패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리를 내줬다. 지금은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려났다.

지난달 27일 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에선 4명의 레지스탕스가 영원히 묻히는 행사가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0년이 지났지만 프랑스는 그들의 저항정신을 잊지 않았다. 비록 흙으로 돌아간 육신일지언정 엄숙하게 국기로 덮은 관으로 모셨다. 한국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한국에 태극 을지 충무 화랑 등 무공훈장제도가 생긴 것은 1950년 10월 28일. 6·25전쟁이 발발하고 4개월 뒤의 일이다. 그전에 전공(戰功)을 세운 장병들은 수훈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에는 주려야 줄 훈장이 없었다’는 게 정부의 변명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들의 명예를 팽개쳐두는 건 한국 사회의 무관심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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