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에서 해킹 프로그램 관련 업무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과장 임모 씨(45)는 최근 야권과 언론을 통해 해킹 의혹이 제기되면서 4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임 씨는 19일 공개된 유서에서 “내국인이나 선거 관련 사찰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자료를 삭제했다”고 밝혔다.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부분이다.
○ 유서 곳곳에 ‘신중한’ 표현
임 씨의 유서 내용을 보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정원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유서 첫머리에 ‘원장님, 차장님, 국장님께’라고 명시한 그는 “동료와 국민들께 큰 논란이 되게 해 죄송하다”며 현 사태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업무에 대한 열정’ ‘직원의 의무로 열심히 일했다’ 등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킹팀을 동원하면서까지 정보 수집에 나선 것이 불법 의혹을 일으킨 것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순수한’ 의도였음을 강조한 셈이다.
임 씨는 또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상급자에게 전하는 내용인 것을 감안하면 자신의 결백을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알리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임 씨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부 자료를 삭제한 것이 오히려 국정원을 난처하게 만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이 해킹 대상과 관련 정보를 공개하기로 한 마당에 해당 자료를 독단적으로 삭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정원이 ‘불법 사찰’ 의혹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임 씨에 대한 국정원 내부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해킹 자료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서버를 삭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의 주장은 진위를 의심받을 상황에 놓였다.
임 씨가 숨진 채 발견된 차량에서는 유서를 쓴 필기구는 없었다. 18일 오전 임 씨가 집에서 나오기 전 미리 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유서 곳곳에는 쉼표(,)나 마침표(.)가 진하게 표시됐고 삽입기호(∨)를 써서 표현이 수정된 흔적도 여럿 발견됐다. “대테러, 공작활동에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하였습니다”라고 적었던 내용에 ‘대테러’와 ‘공작’ 사이에 ‘대북’을 추가하고 ‘공작활동에’와 ‘지원했던’ 사이에 ‘오해를 일으킨’을 덧붙였다. 임 씨가 유서를 되풀이해 읽어보면서 민감한 표현이나 부족한 내용을 고친 것으로 보인다. 필적 감정 전문가인 양후열 법문서감정연구원장은 “유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씨체가 일관되고 마침표까지 확실히 표기해준 점, 지속적으로 단어를 고치며 의미를 확실하게 수정하려 한 점 등으로 볼 때 (임 씨가) 비교적 차분한 상태에서 의사를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서 공개를 반대하던 유족들은 국정원과 경찰, 다른 가족들의 설득 끝에 19일 오전 유서 일부를 공개했다. 가족에게 남긴 유서 2장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것으로 전해지나 유족들의 반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 집 나온 뒤 바로 극단적 선택한 듯
임 씨가 경기 용인 자택을 나선 것은 18일 오전 5시경으로 알려졌다. 외출 전 부인에게는 “직장에 일찍 나가봐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 해킹 사태가 정치적 쟁점이 된 이후 임 씨는 가족들에게 “요즘 직장 업무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을 나간 임 씨가 연락이 두절되자 부인은 오전 10시 4분경 119에 신고해 소방관들이 임 씨를 찾아나섰다. 2시간 뒤 임 씨가 발견된 곳은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 화산CC 인근 화산1리 마을회관에서 500여 m를 산길로 들어간 고라지골이라는 곳이었다. 임 씨는 마티즈 차량 운전석에 앉은 채 숨져 있었고 조수석과 뒷좌석 위에서 다 탄 번개탄이 발견됐다. 유서는 조수석 번개탄 옆에 포개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경찰은 임 씨가 집을 나와 곧바로 야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일 오후 강원 원주시 문막읍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동부분원에서 진행된 임 씨의 부검은 30여 분 만에 끝났다. 정낙은 국과수 중앙법의학센터장은 “외상 등 타살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부검 결과 및 현장에서 발견된 가검물 등에 대한 검사 결과를 종합해 조속한 시일 내에 수사기관에 통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기도에서 일산화탄소 농도가 75%로 높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임 씨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됐던 용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유가족들은 고인의 죽음에 비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한 유가족은 “평소 책임감이 강했던 임 씨가 두 딸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며 “일개 과장이 무슨 권한이 있었겠느냐. 아이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위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 씨의 빈소는 경기 용인의 한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날 빈소에는 이병호 국정원장을 비롯해 국정원 직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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