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어른도 과학을 즐길 권리가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3일 03시 00분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지난 주말 특이한 모임에 참석했다. 전국에서 모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가락만 한 돌덩어리부터 그림엽서, 책, 논문, 형형색색 칠이 된 동물 모형까지 다양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공룡을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하는 조촐한 모임’이라는 자리였다. 공룡 책을 쓰기도 한 젊은 고생물학자 박진영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모인 전국의 공룡 팬 모임이었다. 고교 3학년 학생부터 대학생, 생명과학 연구자, 디자인 전문가, 편집자 등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특별히 뭘 해야 한다는 계획은 없었다. 마음과 취미가 맞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거의 전부였다. 보따리 풀듯 손수 가져온 공룡 모형이나 화석 조각을 서로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눈빛이 제법 빛났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참 그리웠을 거다.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유년기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유년기 기억상실증을 겪는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교체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8세 전후로 이전의 기억을 상당수 잊어버리는데, 그래서인지 학교 가기 전의 기억은 희귀한 몇 장면의 삽화로만 아련히 남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순히 기억만 잊는 게 아닌 것 같다. 취향도 상당 부분 잊어버린다. 그리고 거기엔 과학에 대한 열광도 있다. 생각해 보자. 어려서 공룡박사 소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나 천체 망원경을 사달라고 생떼를 써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두가 사납거나 징그러운 곤충을 보고도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었고,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왕국’이 나오면 눈을 떼지 못했다. 전자제품은 분해하라고 있는 물건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공룡박사, 자연학자, 공학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어느 시기가 되면 모두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잃는다.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험 중심의 교육 때문에 질렸을 수도 있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급해져서일 수도 있다. 과학은 어느 순간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교육거리 이상이 되지 못한 채 성인의 세계에서 멀어져 갔다.

과학이 성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준 낮은 분야여서는 아닐 것이다. 과학은 지금도 최고 수준의 두뇌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고 흥미로운 성과를 쏟아내는 분야다. 내용도 우주나 존재의 비밀을 밝히는 거창한 것부터, 잔 속의 커피가 왜 넘치는지를 설명하는 일상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혁신과 도전, 집요한 호기심이 이끄는 젊은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모든 장점에도 과학은 ‘어른은 몰라도 되는 것’ 내지 ‘괴짜나 좋아하는 분야’가 됐다. 미스터리다.

두 해 전, 영국의 런던자연사박물관에 갔을 때다. 곤충 화석 앞에서 젊은 커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국인과 이탈리아인 남녀로 장거리 연애 중이라고 했다. 간만의 데이트인데 화석을 보러 왔다는 게 인상 깊어 귀국 뒤에 여기저기 이야기를 했는데, 반응이 하나같이 안 좋았다. 아마 아이들만 가득한 한국의 과학관을 떠올렸으리라.

그런데 최근 조금 변화가 느껴진다. 과학을 문화처럼 즐기는 성인이 늘고 있다. 지상파 텔레비전에서 과학을 다루는 고정 프로그램이 몇 생겼고 과학 팟캐스트 방송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성인만을 위한 과학 강연도 늘었다. 슬쩍 기대하게 된다. 공룡과 별과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이제 오는 걸까 하고.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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