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재일동포 사회는 올해 110년째를 맞는다. 일본 땅에선 온갖 수난과 차별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오공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본부 단장은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수는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강제병합의 1차 피해자이면서도 주재국으로 귀화(시민권 취득)한 수가 많다는 점에서 특수한 위상을 갖고 있다. 특히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두 조직이 70여 년간 맞섰다는 점도 다른 동포사회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 민단에 대항했던 총련의 쇠락
민단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 3일 창립했다. 국민(民)이 단(團)결하자는 취지가 이름에 담겨 있다. 총련은 1955년 5월 25일 설립됐다. 초창기 총련은 규모와 조직력에서 민단을 압도했다. 1959년부터 재일동포 5만9000여 명을 북송하면서 재산을 기부 받아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총련의 우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따라 협정영주권을 신청하면서부터다. 1971년까지 5년 남짓 동안 당시 재일동포 60만 명 가운데 36만 명이 한국 국적을 신청했다. 민단이 여권 발급을 대행하면서 단원 수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총련이 쇠락한 결정적인 원인은 평양에 무조건 복종하던 경직된 운영 방식 때문이었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기자였던 김현 씨는 “평양의 지시가 만능이 아님을 알면서도 추종한 총련이 나중에는 지령이 떨어져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위축됐다”고 말했다. 외교 당국자도 “북한의 3대 세습에 실망한 사람들이 등을 돌린 게 몰락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공동체 역할을 했던 총련 학교의 쇠락은 학부모들의 외면으로 가속화했다.
총련은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입회나 탈퇴 과정이 없는 점조직이기 때문이다. 4만5000명 안팎으로 추산되는데 지난해 말 재일동포 총수(50만451명)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오 단장은 “핵심세력은 여전히 공고해 총련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는 건 착각”이라고 강조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국교가 없는 북-일 사이에서 총련은 사실상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대화 창구로 남겨둘 것”이라고 말했다. ○ 총련을 이긴 민단, 스스로와 싸울 차례
일본에 있는 10개 공관(대사관, 총영사관) 가운데 9개의 부지와 건물을 모두 민단이 기증했다. 현재 시세로 2조 원이 넘는다. 1960년대 모국 투자, 1970년대 새마을운동, 1980년대 서울올림픽 성금, 1990년대 외환위기 외화송금 등 현금 지원(약 8000억 원)도 이어졌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에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642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태윤 주오사카 총영사는 “재일동포들은 피부색으로 일본인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일본인이 되고 싶은 유혹을 크게 느낀다”며 “민단을 중심으로 귀화하지 않고 70년간 재일 한국사회를 유지한 건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단도 이젠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젊은 단원들이 유입되지 않아 고령화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총련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민단의 존재 이유도 희미해졌다. 국회는 민단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며 임의단체인 법적 지위를 사단법인으로 바꾸지 않으면 연간 80억 원에 이르는 정부 지원금을 40%까지 깎겠다고 벼르고 있다.
○ 북한과의 통일연습, 교육에서 시작해야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재일동포 사회가 갈등을 극복하고 새출발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민단과 총련 사이의 ‘치유’를 시도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2006년 5월 17일 당시 하병옥 민단 단장이 총련을 찾아가 전격 화해를 선언했다가 큰 반발을 불렀던 ‘5·17 사태’ 이후로 민단-총련의 교류는 완전히 끊어졌다. 즉흥적인 통합보다 체계적 준비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 당국자는 “일본 사회에서 총련을 상대로 ‘미리 온 통일’을 경험해볼 수 있다”며 “총련학교 학생들을 점차 한국학교로 흡수하는 계획과 점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총련 학교와 대비해 ‘민단계 학교’로 불리는 한국 학교는 일본 전역을 통틀어 4곳. 대학교까지 있는 총련 학교(60여 곳)와 비교가 안 된다. 한국 학교 중 3곳은 일본 정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일본식 사립학교(일조학교)이다. 다만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신 일본 교육과정을 따라야 한다. 국어와 한국역사 등 일부 교과목에만 자율성이 있다. ‘한국’이라는 이름도 쓸 수 없다. 광복 직후 민족학교를 지켜내려다 동포 2명이 목숨을 잃는 ‘한신교육투쟁’까지 겪었던 역사가 부끄러울 정도다. 오사카의 금강학교는 도심에 있다가 재개발에 밀려 남부 바닷가(스미노에 구 난코·住之江區 南港)로 쫓겨났다. 이 학교의 성시열 교장은 “학부모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지만 자녀에게 한국을 가르치기 위해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열정에만 기댈 수는 없다. 한국의 관심과 지원 없이는 총련 학교 흡수는커녕 민단 소속 자녀들의 한국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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