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는데 어떻게 화재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생활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재로 변하고 그나마 남은 물건들은 불을 끄려고 뿌린 물에 젖어버린 화재 현장을 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이다.
하지만 화재 원인을 분석해 책임 소재를 가려내는 화재감식 전문가들은 재만 남은 현장에서도 제대로 ‘발굴’하기만 하면 반드시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고 얘기한다.
2013년 1월 발생한 서울 중랑구 묵동 빌라 화재는 화재감식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일가족 4명이 잠자던 1층 빌라에서 발생한 불로 아버지 김모 씨(당시 64세)가 현장에서 숨졌다. 어머니 김모 씨(당시 61세)는 연기 질식으로 병원에서 치료받다 결국 사망했다. 자녀 두 명도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상당 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어 실화(失火)로 볼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화재감식 결과가 알려준 진실은 전혀 달랐다. 사건 초기 제기된 담뱃불로 인한 실화라는 추정은 발화지점 때문에 배제됐다. 천연가죽 소파에 담뱃불이 떨어져 불이 나려면 여러 시간 동안 불꽃 없이 내부 연소가 이어지는 ‘훈소(燻燒)’가 진행되며 집 안에 연기가 가득 차야 한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소파와 그 옆에 놓여 있던 가구가 가장 많이 불에 탄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곳이 발화지점으로 지목됐다. 또 아버지 김 씨가 앉아 있던 소파의 방석 부위가 불이 나기 전에 따로 분리됐던 것으로 감식되고 몸속에서 수면제 ‘졸피뎀’ 성분까지 발견되면서 상황은 명확해졌다.
부인 김 씨가 남편에게 술과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후 옆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방석을 제거한 소파에 앉히고 소파와 가구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조사 결과 부인 김 씨가 사고 6개월 전부터 남편 앞으로 화재보험 3개를 잇달아 가입하고 8억1000만 원 상당의 보험금 수혜자를 자신 앞으로 해놓은 사실도 드러났다.
화재가 나면 지문이나 유전자(DNA)처럼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사라진다. 이 때문에 화재 원인을 찾아내는 화재감식은 불타고 남은 증거를 분석하며 진행된다. 화재감식 교본에는 유류 화재에서 보이는 연소 패턴, 불타고 남은 기둥을 통해 추정하는 불길의 움직임 등이 공식처럼 설명돼 있다. 이런 화재감식은 화재 피해 당사자도 몰랐던 화재 원인을 밝혀내기도 한다. 지난달 중순 서울 서초구의 한 고급 빌라에서 발생한 화재 당시 거주자는 “내가 켜놓은 향초가 있던 방에서 불이 났다”며 자신의 잘못이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감식 결과는 뜻밖이었다. 향초 옆 TV의 콘센트가 꽂혀 있던 멀티탭에서 불이 난 것으로 드러났다. 외부에서 발생한 화재로는 나타날 수 없는 형태로 녹아내린 멀티탭 안 금속단자 하나가 바로 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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