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後세대에 사죄 계속할 숙명 지워선 안돼” 과거사 털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5일 03시 00분


[광복 70년]진심 없는 아베 담화

14일 일본 도쿄(東京) 총리관저.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담화를 읽어 내려가자 밑줄을 쳐 가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2012년 12월 취임 이후 왜곡된 역사 인식을 보여 온 아베 총리의 이날 담화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 입장을 확인하는 동시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미래 질서 구축에 일본이 어떤 태도로 임할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담화는 A4용지 5쪽에 4000자 분량으로 1200자 안팎이었던 역대 전후 담화보다 3배 이상으로 많았다. 내용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일부 대목에선 국내외에서 쏟아진 요구들을 이것저것 반영해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했지만 총리 자신의 신념은 바꾸지 않고 요구들을 나열해 ‘물타기’를 시도했다는 게 중평이다.

먼저 식민지 지배와 침략과 관련해 ‘과거형’으로 대신한 것에 대해 아베 총리는 담화 발표 후 가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침략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논의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2013년 국회 답변의 연장선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식민 지배는 이야기하면서도 침탈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는데 당시 제국주의 시대의 분위기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면서 “사죄와 반성을 말하면서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지도 않고 동북아의 주변국들에 ‘문제는 일으키지 않겠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실제로 담화 앞부분에서 “식민 지배의 파도는 19세기 아시아에도 밀려들었다”며 시대 상황을 장황하게 나열하면서 “(일본은) 나아가야 할 진로를 잘못 선택해 전쟁의 길로 걸어가게 됐다”고 말해 식민 지배와 침략을 일본의 가해 행위가 아니라 역사적 차원의 비극이라는 식으로 비켜 갔다. 일본이 전후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과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도 내세웠는데 이는 무라야마 담화나 고이즈미 담화에서는 없었던 표현이다.

아베 총리는 특히 “일본에서는 전후 태어난 세대가 지금은 인구의 8할을 넘는다”며 “전후 세대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전후 국제사회에 복귀한 것과 관련해서도 “관용의 마음”을 거론하며 “화해를 위해 힘을 쏟아 준 모든 나라, 모든 분에게 마음에서부터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했다. 동아시아에서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책임이 작지 않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전장의 그늘에는 깊이 명예와 존엄을 손상당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나라가 안긴 사실”이라고도 명시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불만스러운 점이 있지만 평소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에서는 진일보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진 소장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주변국을 의식한 발언을 담아 발표했다. 반성은 들어가도 사죄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얘기를 한 점은 기대 이상”이라고 했다.

이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한국이 우려했던 우파의 논리에 완전히 끌려간 내용은 아니다”며 “모자라는 부분도 있지만 위안부 문제를 언급했으니 그 부분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일본학연구소장)는 “이번 아베 담화에 실망해 한일 관계를 훼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국민 중 상당수는 아베와 다르다는 데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문제까지도 염두에 둔다면 한일 관계를 잘 다뤄 한중일 정상회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실리적”이라며 “이렇게 해서 성과를 낸다면 현 동북아 정치 지형 속에서도 주도권을 갖고 우리만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각수 국립외교원 국제법센터 소장 겸 전 주일대사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반발할 수준도 아니다”며 “담화의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양국 간 가장 시급한 현안인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장원재 특파원 /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아베담화#사죄#과거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