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의 시사讀說]대한항공 부지의 ‘관제 프로젝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0일 03시 00분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서울 경복궁 옆 송현동 부지는 대한항공 땅이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남의 사유지에 한국 문화체험 공간인 케이-익스피리언스를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건과 함께 재산 헌납 같은 시대착오적인 말들이 떠올랐다.


문화융성, 표현부터 졸렬


대한항공이 한옥이든 뭐든 7성급 호텔을 지어 ‘부자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데에 나도 반대다. 그곳이 사유지이긴 하지만 서울의 중요한 공간인 만큼 공공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을 지을지 결정하고 발표하는 것은 대한항공이어야 한다. 대한항공은 발표장에서 정부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케이-익스피리언스 계획은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와 함께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문화융성 정책의 하나로 발표됐다. 내게 문화융성은 그 표현부터가 졸렬하다. 과거 문화창달이란 복합어만 해도 ‘문화를 창달하자’는 식으로 두 단어가 연결돼 구호의 말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문화융성은 ‘문화가 융성하다’는 식으로밖에 연결할 수 없어 뭘 하자는 말로서는 어색하다. 이 정부의 조어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다.

오늘날의 상업적인 문화는 정부가 개입해서 융성해지는커녕 쇠락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케이팝이 딱 그렇다. 정부가 개입하면서부터 케이팝의 창의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도움을 준 이상 공무원은 성과를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인기가 검증된 노래와 춤을 선호하고 기획사도 따를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것은 실패할 확률이 크기 때문에 배제된다.

창의력을 다퉈야 할 자리에 선정성이 들어섰다. 최근 스텔라라는 걸그룹의 선정적인 의상과 춤을 보고 놀랐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식의 싱그러운 매력은 사라졌다. 멤버를 바꿔 돌아온 원더걸스마저 스텔라를 닮아가고 있다. 케이팝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정점을 찍은 이후 계속 내리막길이다. 그 내리막길은 문화융성만 거론하면 케이팝 얘기를 꺼내는 박 대통령의 임기와 정확히 겹친다.

미다스의 손은 고철도 황금으로 만들지만 우리 정부 문화부는 황금도 고철로 만들어 버린다. 광화문광장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을 볼 때마다 옛 문화부 건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 건물은 바로 옆의 미국대사관 건물과 더불어 필리핀 기술로 지은 남국적인 느낌의 아름다운 쌍둥이 건물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쌍둥이 건물 특유의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성도 사라졌다. 다른 정부 부처도 아니고 문화부가 한 반(反)문화적 개조에 화가 나기도 한다.

지금 광화문 일대에서 가장 문화적 개조가 필요한 곳은 세종문화회관이다. 강북에서 평일 저녁 공연 시간에 맞춰 강남 예술의전당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세종문화회관이 형편없는 음향시설 때문에 음악공연장으로 기능하지 못한 지 오래다. 세종문화회관은 아예 건물을 새로 짓는 식의 전면적 개조가 필요하다.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 소관이라고 하지만 정부가 정말 문화가 융성하게 하려면 이런 것부터 지원해야 한다.

관제로는 성공 못해


광화문 일대에서 가장 생동적인 문화적 공간은 교보문고이다. 민간이 운영하기 때문에 내버려둬도 끊임없이 쇄신해서 그럴 것이다. 케이-익스피리언스라는 복합문화센터는 대한항공이 관에 떠밀려 짓는 것이다. 지지부진하다가 호텔 얘기가 다시 나올 것이다. 문화라는 게 묘해서 정부가 앞장서 끌고 가려 해서는 절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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