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에서 대구·경북(TK) 지역 출마를 1년 넘게 준비해 온 A 씨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평소 알고 지내던 공무원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지역구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지,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어딘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행사 관련 공지사항이 올라오면 확인할 수 있었지만 최근엔 더 이상 정보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행사장에 나와 인사를 다니는 것을 의식해 최대한 ‘조용히’ 행사를 치르게 해 달라는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A 씨는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사무실로 팩스 한 장 받으면 알 수 있는 행사 내용 하나도 나는 알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행사장에 자리도 마련돼 있지 않은데 늘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눈치 보면서 인사하고 악수하는 것도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선 못 할 일”이라고 털어놨다.
공직선거법상 사전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지 않다 보니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예비 후보자가 먼저 주민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출마 의사를 밝히는 것은 법 위반이다. A 씨는 “여긴 어쩐 일로 왔냐”며 행사장에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왔다”고 에둘러 답한다고 한다.
오픈프라이머리 논의가 바꿔 놓은 선거풍속도
새누리당이 내년 총선에서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참여경선제)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해 추진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지난해 7월 당권을 잡은 김무성 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모든 지역에서 경선으로 후보자를 뽑겠다고 공언하면서 공천을 원하는 정치인들은 지역 표밭 다지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정치 신인이나 원외 인사들에게는 현역 의원의 벽을 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공천=당선’으로 이어지는 새누리당의 텃밭 지역에서는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TK 지역 출마를 준비 중인 B 씨는 “김 대표가 ‘공천을 받으려면 권력자에게 줄 설 생각하지 말고 지역에서 뛰어라’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며 “선거법 때문에 현역 의원과 달리 홍보도 제대로 못 하고 눈칫밥 먹어 가면서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현장 실정을 김 대표가 안다면 저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현역 의원들은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의정보고서를 내거나 현수막을 내걸고 의정 활동을 홍보할 수 있지만 정치 신인이나 예비 후보자들은 사전선거운동이 허용되는 12월이 돼야 자신의 공약을 알릴 수 있다. B 씨는 “공천을 국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김 대표의 뜻은 100% 공감한다”면서도 “최소한 현역 의원들과 정치 신인들이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이건 불공정해도 너무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A 씨도 “지역구 준비를 해본 사람들 사이에선 오픈프라이머리는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공천 혁명’인가 ‘기득권 나눠 먹기’인가
전당대회 공약으로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약속한 김 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역구에서 쫓겨났던 아픈 경험이 있다. 당 공천위가 김 대표의 지역구였던 부산 남을을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하면서 공천을 받지 못할 상황에 몰린 것. 김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백의종군’을 택했다.
앞서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도 당시 친이(친이명박)계가 주도했던 공천에서 ‘친박 좌장’으로 찍혀 낙천한 데 이어 두 번 연속 공천권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김 대표가 “공천 줄 세우기가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며 “권력자에게서 공천권을 뺏어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공언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외견상 김 대표가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을 강력 추진하는 것은 강력한 ‘개혁’ 조치로 볼 수 있지만 속내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친박(친박근혜)계는 김 대표가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공천 영향력 행사를 막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물론 김 대표 측은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은 20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정치 개혁”이라고 정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헌정사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던 오픈프라이머리가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 나눠 먹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회는 정치 신인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예비 후보자 등록을 현행 선거일 120일 전에서 1년 전으로 변경하고, 현역 당협위원장은 선거일 180일 전까지 사퇴하는 내용의 혁신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야당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해 법 개정은 난망해 보인다.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 신인들만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상황이다.
반면 부산·경남(PK) 지역의 한 새누리당 재선 의원은 “그동안 중앙당 권력자에게 끈을 대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이 출마할 수 있다”며 “20대 총선에서는 이들의 영향력이 미미할 수 있지만 21대 총선부터는 정말 위협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4년 동안 지역 표밭을 제대로 갈아놓은 사람들이 나온다면 현역 의원들이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20대 총선 도입 실현 가능성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5일 “오픈프라이머리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일괄 타결하자”며 전격적인 ‘빅딜’ 제안을 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공천 혁명을 다른 제도와 맞바꿀 수 없다”며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논의하자는 식으로 피해 나갔다. 활동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정개특위에서 여야가 극적으로 합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김 대표의 의지는 확고하다. 20일에는 “정치생명을 걸고 오픈프라이머리를 관철하겠다”고 말할 정도다. 야당이 끝끝내 합의해주지 않을 경우 여당 단독으로라도 ‘김무성식 오픈프라이머리’를 전격 도입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 대표는 ‘국민공천제TF’를 통해 여당 단독으로 오픈프라이머리를 실시할 경우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표도 앞서 2012년 대선과 올해 2월 전당대회에서 오픈프라이머리를 공약으로 내세운 적이 있다. 게다가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은 18대 국회 당시 야당의 당론이자 혁신안으로 채택됐었다. 다만 문 대표는 지역구 20%를 전략공천 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여야가 동시에 모든 지역구에서 오픈프라이머리를 강제하는 것은 정당의 자율성 침해 요소가 다분하다는 것이 야당의 논리다.
총선이 8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야가 동시에 오픈프라이머리를 치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현실론도 나온다.
친박계 홍문종 전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18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며 “야당이 동의할 생각이 없고, 오픈프라이머리를 하려면 이미 당협위원장들이 직을 다 내려놨어야 한다.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 측근으로 꼽히는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도 “여야 간에 오픈프라이머리를 합의하고 법 개정까지 완료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완전한 오픈프라이머리를 실시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운 여건”이라고 말했다.
도입 불발 시 여야 총선 전략은
새누리당은 정개특위에서 여야 합의가 불발되더라도 최대한 오픈프라이머리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공천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당헌·당규상 당원 50%, 일반 국민 50%의 비율로 국민참여선거인단을 꾸려 경선을 치르도록 하는 내용을 수정해 일반 국민의 참여 비율을 대폭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
상대 당 지지자가 경선에 참여해 일부러 약한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역선택의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마련된다면 당원과 일반 국민 구분 없이 100% 국민 경선을 치르는 방안을 전격 채택할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전략공천을 사실상 원천봉쇄할 수 있도록 당헌·당규상 명시된 ‘우선추천지역 선정’ 조항은 삭제할 방침이다.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이 무산될 경우 야당이 정치 개혁에 호응하지 않았다는 논리로 ‘개혁 대 반(反)개혁’의 구도를 만들겠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셈법이다.
반면 새정치연합은 현 정치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안했지만 새누리당이 수용하지 않아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이 불발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는 생각이다.
새정치연합은 현행 당헌·당규상 전략공천을 20% 이내에서 실시하고, 그 대신 당 혁신위가 마련한 안이 확정되면 현역 의원을 평가해 하위 20%를 공천에서 탈락시켜 ‘공천 개혁’의 명분을 찾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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